한국도 그렇다. 198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이어지는 고도성장기에 우리 국민의 손에 들린 것은 신용카드였다. 특히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정부가 내수 진작과 과세 투명성 확보라는 국가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용카드 사용을 파격적으로 장려하면서 지금의 카드 중심 결제 인프라가 뿌리를 내렸다.
오늘날의 카드 결제망은 단순한 지급수단을 넘어 소비와 유통, 데이터를 잇는 국가 핵심 금융 인프라다. 수천만 명의 일상을 지탱하는 플랫폼이자 금융권에서 소비자와 가장 밀접한 접점을 가진 채널로서 그 위상은 공고하다.
현재 카드업계가 마주한 현실은 이러한 위상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가맹점 수수료는 지난 12년간 꾸준히 인하됐다. 그 결과 전체 가맹점의 약 96%에 달하는 영세·중소 사업자 구간에서는 수수료율이 원가(적격비용) 수준이거나 그 이하로 떨어지는 '역마진' 구조가 고착됐다. 결제 규모는 매년 역대 최대치를 경신하지만, 본업인 결제 부문에서 수익을 내지 못하는 '결제의 역설'이 이어지는 이유다.
이러한 수익성 악화의 이면에는 겹겹이 쌓인 규제의 벽이 자리하고 있다. 3년마다 돌아오는 '가맹점 수수료 적격비용 재산정 제도'는 도입 이후 사실상 단 한 번의 인상 없이 수수료를 낮추기만 하면서 업계의 활력을 앗아갔다. 여기에 가계부채 관리의 일환으로 카드론이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규제 대상에 포함되면서, 결제 부문의 손실을 보전해주던 대출 사업마저 움츠러들었다.
여기에 카드사는 은행과 달리 예금을 받을 수 있는 수신 기능이 없어 사업 자금의 대부분을 시장에서 여전채(카드채) 발행을 통해 조달해야 하는 구조적 한계가 있다. 금리 상승기마다 조달 비용이 급증해 사업 기반 자체가 흔들릴 수밖에 없는 환경이지만, 이를 타개할 신사업 진출의 문턱은 여전히 높다. 중소기업 적합업종 지정이나 부수 업무 제한 등의 규제가 혁신의 발목을 잡으면서, 데이터 비즈니스나 스테이블코인 접목등 새로운 수익 모델을 창출하기보다 기존의 위축된 시장에 머물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그럼에도 카드사의 유용성 때문에 각종 위기 상황에서는 카드사들이 빠짐없이 동원된다. 최근에도 미국-이란 전쟁으로 기름값이 급등하자 당국은 카드사에 주유비 할인 혜택 추가 또는 환급 확대 등의 조치를 요구했다. 지난해 민생회복 소비쿠폰 정책이 실현됐을 때도 카드사들은 가맹점에 대한 수수료를 추가로 인하해야 했다. 가맹점과 기업, 소비자 모두를 아우르는 국내 최대 접점을 보유한 결제 인프라 기업이라는 이유에서 감당해야 했던 수난이었다.
카드사들의 수난은 단지 카드업계의 위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카드사는 트래블카드와 같은 혁신 서비스의 형태로 소비자들의 금융 경험을 확장시켜왔다. 고유가나 재난 상황에서는 각종 할인이나 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국민 지원 정책을 수행하는 '보이지 않는 축'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수익 기반이 계속 흔들리면 결국 '알짜카드'의 대거 단종, 부가서비스 축소 등 형태로 '비용의 소비자 전가'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장기적으로 금융 소비자 선택권이 심각하게 훼손된다는 얘기다.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야 할 때다. 지난 20여 년간 카드사가 구축해온 방대한 결제 인프라와 데이터, 이용자 접점을 지금처럼 규제로만 묶어두는 것이 과연 국가 경제에 바람직할까. 빅테크 중심의 플랫폼 결제 환경이 재편되는 상황에서, 검증된 기존 인프라를 활용하기보다 낡은 규제로 틀어막는 방식은 금융 산업 전반의 경쟁력을 저하시킬 우려가 크다.
기술 환경이 변한 만큼 카드업계의 변화도 불가피하다. 그러나 변화를 스스로 도모할 여유도 주지 않은 채 '알아서 변화된 세상에 적응하라'는 식으로 방치해서는 안된다. 최근 논의되는 스테이블코인이나 CBDC(중앙은행 디지털화폐) 등 새로운 결제 생태계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견고한 카드 네트워크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 고민하는 것도 침체된 카드업계에 활력을 불어넣을 하나의 대안일 수 있겠다.
카드업계의 고충을 그저 '그 회사들만의 사정'으로 치부하는 건 곤란하다. 이제는 수수료 인하와 규제 강화라는 단편적 접근에서 벗어나야 한다. 기존 인프라를 살리고 이를 디지털 금융 혁신의 교두보로 확장하기 위한 정책적 논의가 시급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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