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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자로 벌어와도 풀리지 않는 달러━
사상 최대 흑자에도 환율이 약세를 면치 못한 1차 원인은 증시를 둘러싼 '비대칭적 수급'이다. 한 시중은행 외환딜러는 "과거에는 수출이 좋으면 원화가 강해지는 흐름이 있었지만, 최근에는 그 공식이 약해졌다"며 "수출은 여전히 좋은데 해외 투자 확대 등으로 달러가 예전처럼 국내 현물환시장에 공급되지 않는 구조 변화가 작용하고 있다"고 말했다.2023~2025년 한국의 경상흑자 누계는 2556억달러다. 그러나 같은 기간 거주자가 해외 주식·채권을 사들 금액만 2527억달러에 이른다. 벌어들인 흑자를 가계와 기관이 해외 증권투자로 거의 그대로 내보낸 셈이다. 여기에 기업의 해외 직접투자 1231억달러까지 더하면, 빠져나간 달러가 외국인의 국내 투자 유입(증권 1110억달러·직접투자 477억달러)을 크게 웃돈다. 벌어온 달러보다 내보낸 달러가 많으니, 외환시장에서는 원화를 팔려는 힘이 우위에 설 수밖에 없다.
수요가 이렇게 큰데 공급은 막혀 있다. 수출로 사상 최대 실적을 낸 기업들도 번 외화를 현지에 유보한다. 정부는 이 유보를 풀려고 2023년 외국 자회사가 본사에 보내는 배당에 세금을 거의 매기지 않는 제도(수입배당금 익금불산입)를 도입했지만 효과는 단발에 그쳤다. 그동안 해외에 쌓아둔 자금이 일시에 들어오면서 그해 직접투자 일반배당 수입이 144억달러에서 443억달러로 세 배로 뛰었지만, 그 증가분의 상당 부분을 삼성전자 한 곳이 송금한 약 226억달러(29.5조원)가 채웠다. 누적분을 털어낸 효과가 사라지자 기업들의 국내 송금액은 다시 줄었다.
반면 달러 유입은 더 줄었다. 삼성전자 별도재무제표에 따르면, 삼성전자가 1분기 해외 자회사로부터 받은 배당 송금은 2500억원으로 평년 1분기(약 3.6조원)의 7% 수준으로 급감했다. 들여온 돈은 줄고 미국 공장 등으로 내보낸 돈은 늘면서, 삼성전자는 한 분기 동안 외환시장에서 달러 24억달러어치를 매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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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환율 고통'…물가, 내수, 기업 연쇄 파장━
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은 5월 24일 코스피 급등에 따른 외국인의 차익 실현과 그 환전 수요를 환율 상승의 원인으로 짚으며, 고금리·고물가·고환율을 "한국 경제가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수반되는 성공의 비용"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여러 연구와 데이터는 고환율의 충격을 '성공의 비용'으로 치부하기 어렵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창용 전 한국은행 총재가 지난해 12월 환율 상승이 "이익을 보는 사람과 손해 보는 사람을 극명히 나눈다"고 지적했듯, 고환율은 그 비용을 약한 쪽에 몰아주며 'K자 양극화'를 키운다.환율이 오르면 수입물가가 오르고, 그것이 소비자물가로 번지며 가계의 실질구매력을 깎는다. 현대경제연구원은 환율이 10% 오르면 소비자물가가 6개월 뒤 최대 0.5%포인트 높아진다고 분석했다. 부담이 유독 무거운 건 한국의 구조 탓이다. 국회예산정책처에 따르면 한국은 1차에너지의 약 96%를 수입에 의존하고 곡물도 상당 부분 수입한다. 약세의 충격이 에너지요금과 식탁물가라는 가장 피하기 어려운 항목부터 가계를 때리는 이유다.
타격은 기업으로도 번진다. 특히 원자재·중간재를 수입해 국내에 파는 내수·소비재 기업이 직격탄을 맞는다. 수출로 환차익을 누리는 기업은 소수다. 중소벤처기업부에 따르면 수출하는 중소기업은 전체의 1.2%에 그친다 .나머지 대부분 기업은 오른 수입원가를 떠안으면서 그것을 가격에 전가할 내수 여력도 충분치 않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제조업체 2208곳을 조사한 결과 38%가 고환율로 실적이 악화됐다고 답한 반면, 수출이 개선됐다는 응답은 8%에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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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한 제도로 투자 늘리고 외화 유출 막는 일본━
전문가들은 지금까지의 환율 안정책만으로는 이 특수한 상황을 풀 수 없다며 '꼬인 수급'을 직접 겨냥한 정책을 주문한다. 개입·금리·환헤지 같은 기존 수단은 흐름의 속도만 늦출 뿐, 원화로 자금이 모이게 하려면 결국 수요와 공급 양쪽을 손봐야 한다는 것이다.먼저 해외에 쌓인 기업 이익을 들여올 정교한 인센티브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국도 2023년 외국 자회사 배당세를 한시 면제해 그해 직접투자 일반배당 수입이 세 배로 뛰었지만, 그 돈이 국내에 머물 이유까지는 설계하지 못해 효과는 한 해로 그쳤다.
관건은 '설계'다. 조건부 세금 감면을 통해 기업이 번 돈이 국내로 들어와 생산적인 자본으로 귀결되도록 하는 것이 핵심이다. 미국의 연구개발(R&D) 세액공제는 기업이 전년보다 R&D 지출을 '늘린 만큼'에만 혜택을 줘, 단순히 비용을 쓰는 데 그치지 않고 투자를 매년 키우도록 유도한다.
일본의 투자촉진세제 역시 해외가 아닌 국내 설비투자분에 한해 공제해, 자금이 국내 실물로 흘러야만 감세 혜택이 돌아가도록 했다. 들여온 돈이 국내 투자·고용으로 이어질 때만 보상하는 설계다. 일본 정부는 2026년 도입한 설비투자 감세 4000억엔이 그 10배인 연간 4조엔 규모의 설비투자를 끌어낼 것으로 보고 있다. 전문가들은 한국이 외국 자회사 배당에 매기는 세금을 깎아줄 때도 이렇게 국내 투자·고용 증가분에 연계하면 국내 고용 창출과 함께 지속적이고 건전한 원화 수요를 만들 수 있다고 진단한다.
국내 기업의 체질을 개선해 자본시장에서 원화 수요를 구조화할 필요성도 제기된다. 삼일PwC경영연구원이 블룸버그 자료로 집계한 결과 한국 상장사의 최근 10년 평균 자기자본이익률(ROE)은 8%로, 미국 15%의 절반 수준에 그쳤다. 2023년 말 기준으로는 5%까지 떨어졌다. 이상호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본질은 저하된 수익력과 인색한 주주환원이 투영된 적정한 평가에 더 가깝다"며, 단기적으로는 주주환원 확대, 장기적으로는 기업의 체질 개선이 정공법이라고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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