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 찾은 경기 화성시 현대차·기아 남양연구소 드라이빙 시뮬레이터의 외관. /사진=현대차그룹
운전석 하나만 놓인 시뮬레이터가 남양 시험장을 달리고 있었다. 다른 공간에서는 차체도 없는 자동차가 스스로 헤드램프를 켜고 공조장치를 작동시켰다. 금형 하나 없이 3D프린터가 자동차 부품을 만들고 로봇은 사람 대신 차체를 스캔했다. 현대자동차·기아 남양연구소에서는 자동차보다 데이터가 먼저 움직이고 있었다.
지난 1일 찾은 경기 화성시 현대차·기아 남양연구소 AMS동(Advanced Mobility Solution). 이곳은 현대차가 소프트웨어 중심 자동차(SDV) 시대를 맞아 연구개발(R&D) 체계를 집약해 놓은 공간이다. 실차를 제작한 뒤 문제를 수정하던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 차량을 만들기 전 가상환경과 디지털 플랫폼에서 대부분의 검증을 끝내는 것이 목표다.

버추얼 드라이빙 시뮬레이터룸에 들어서자 270도 곡면 스크린이 운전석을 감싸고 있었다. 실내는 제네시스 G80 운전석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했다. 스티어링 휠과 계기판, 센터 디스플레이는 양산차와 다를 바 없었고, 운전석 아래에는 차량 움직임을 구현하는 대형 모션 플랫폼이 자리하고 있었다.
드라이빙 시뮬레이터로 주행 성능을 평가 중인 연구원의 모습. /사진=현대차그룹
시연이 시작되자 270도 곡면 스크린에는 남양연구소 주행시험장이 펼쳐졌다. 시뮬레이터는 완만한 코너와 과속방지턱을 지날 때마다 실제 차량처럼 움직였고, 화면 속 노면 변화에 맞춰 차체도 자연스럽게 흔들렸다. 현대차는 남양연구소 시험장을 1mm 단위로 스캔한 데이터를 적용해 실제와 유사한 주행 환경을 구현했다고 설명했다.
대차는 남양연구소 시험장을 1mm 단위로 라이다(LiDAR) 스캔해 노면 경사와 요철, 맨홀, 배수로까지 디지털 데이터로 구현했다. 해외 주요 시험로도 같은 방식으로 데이터화했다. 정필영 주행성능컨셉개발팀 책임연구원은 "드라이빙 시뮬레이터는 가상 공간에서 차량의 성능 변화를 예측하고 평가하는 것은 물론 성능 육성까지 가능한 장비"라고 소개했다.


문제는 데이터 용량이다. 1mm 단위로 구현한 시험장 데이터는 1TB를 훌쩍 넘는다. 이를 통째로 불러오면 실시간 주행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현대차는 차량 주변에 필요한 데이터만 실시간으로 불러오는 '터레인 서버'(Terrain Server) 기술을 자체 개발해 2025년 12월 세계 최초로 연동에 성공했다. 차량이 이동하는 위치에 맞춰 필요한 정보만 불러오고 지나간 데이터는 즉시 비우는 방식이다. 덕분에 연구원들은 실제 차량을 만들지 않고도 승차감과 조향 성능, 서스펜션 세팅을 반복 검증할 수 있다. 설계가 바뀌면 부품을 새로 제작하는 대신 소프트웨어만 수정해 다시 시험하면 된다.
제어기와 기능 검증을 위해 제작된 와이어카의 모습. /사진=현대차그룹
NOVA Lab(Next-generation Open Validation & Automation Lab)에선 자동차가 사라졌다. 차체는 없었지만 헤드램프는 켜졌고 시트는 움직였으며 공조장치는 정상적으로 작동했다. SDV 시대 현대차 연구개발의 또 다른 축인 '와이어카'(Wire Car)가 모습을 드러냈다.
와이어카는 차량 제작 이전 단계에서 제어기와 배선만 연결해 전장 시스템을 검증하는 플랫폼이다. 기존에는 시작차를 제작한 뒤 오류를 찾아 수정해야 했지만, 이제는 실차가 나오기 전에 대부분의 전장 문제를 걸러낸다. 테스트 벤치 하나에는 300여개의 제어기와 최대 500개의 커넥터가 연결된다. AMS동에는 모두 14개의 테스트 벤치가 구축돼 있으며 중앙집중형 SDV 아키텍처와 기존 분산형 아키텍처를 모두 검증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와이어카를 활용해 차량 기능과 제어기 검증을 하는 연구원의 모습. /사진=현대차그룹
연구원이 공조 화면을 조작하자 풍량과 온도가 단계별로 바뀌었다. 동시에 옆 모니터에는 통신 로그가 실시간으로 흘러갔다. 연구원들은 눈으로 공조가 정상 작동하는지 확인하는 동시에 제어기 간 신호가 정상적으로 전달되는지까지 함께 살폈다. 버튼 하나를 눌러도 수십개의 제어기가 서로 신호를 주고받는다. 이 과정에서 통신이 끊기거나 사양이 맞지 않으면 즉시 오류가 발생한다.
반복되는 검증은 대부분 자동으로 이뤄졌다. 공조와 시트, 램프는 정해진 시나리오에 따라 스스로 작동했고 화면에는 성공과 실패 여부가 실시간으로 표시됐다. 하나라도 오류가 발생하면 연구원들은 통신 로그를 분석해 어느 제어기에서 문제가 생겼는지 찾아낸 뒤 소프트웨어를 수정하고 다시 시험을 반복한다. 실차를 분해하고 조립하는 대신 데이터만 바꿔가며 검증을 이어가는 것이다.

현장 관계자는 "실차에서 기능 자체가 작동하지 않는 문제가 발견되면 이후 품질 검증과 협력사 일정까지 모두 영향을 받는다"며 "크리티컬한 문제를 먼저 제거해 다음 단계에서는 완성도 높은 검증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설명했다.
접촉식 측정 장비로 수치 측정을 하는 모습. /사진=현대차그룹
디지털 측정 센터(DMC)는 자동차의 성능이 아니라 '기본기'를 숫자로 관리하는 공간이다. 입구를 지나자 대형 3차원 측정장비(CMM)가 차체를 따라 천천히 움직이며 좌표값을 기록하고 있었다. 연구원들은 차량 한 대당 약 1000개의 측정 포인트를 관리한다. 여기에 점과 점 사이 거리와 위치 관계를 종합적으로 분석하는 '펑셔널 디스턴스'(Functional Distance) 개념을 적용해 약 600~700개의 평가 항목을 도출한다. 문이 제대로 닫히는지, 단차는 없는지, 풍절음이나 누수 가능성은 없는지까지 데이터를 통해 예측하는 것이다.
한진수 파이롯트품질검증팀 팀장은 "연관성 있는 포인트 간의 편차와 거리, 평행도를 계산해 실질적인 품질을 판단한다"며 "약 600개의 평가 항목으로 완성된 측정 체계는 그대로 양산 공장으로 이관돼 동일한 기준의 품질을 구현한다"고 말했다.


광학식 3D 스캐너로 수치 측정을 하는 모습. /사진=현대차그룹
실제로 바로 옆에서는 로봇이 3D 스캐너를 이용해 차량 도어를 빠르게 훑으며 형상을 측정하고 있었다. 과거 숙련자가 1시간30분에서 2시간 이상 매뉴얼로 치수를 재던 작업은 이제 15분 만에 자동화 설비가 대신하고 있었다. 개발 단계에서 확보한 데이터는 국내외 양산공장으로 그대로 전달돼 생산 과정에서도 동일한 기준으로 활용된다.
마지막으로 찾은 적층제조 솔루션센터(AMSC)에서는 여러 대의 3D프린터가 쉴 새 없이 자동차 부품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금속과 플라스틱 소재를 층층이 쌓아 올리자 형상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적층된 금속 부품의 일부를 가공한 샘플. /사진=현대차그룹
현대차는 적층제조 기술을 활용해 시제품 제작은 물론 연구용 부품과 생산라인 지그, 단종 차량 부품까지 제작하고 있다. 설계 변경이 발생하면 금형을 새로 제작하는 대신 즉시 새로운 부품을 출력해 검증을 이어가며 일정을 대폭 단축할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김용욱 매니저는 "세계 최초로 도입된 금속 적층 설비로, 주조나 프레스로는 만들 수 없는 복잡한 형상이나 모터 스포츠 부품처럼 강성 확보와 경량화가 동시에 요구되는 부품 등도 제작할 수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