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채점이 후했나 의심했다. 성적 분포를 확인하니 예년과 비슷했다. 점수가 달라진 게 아니라면, 뭐가 사라진 걸까? 나는 그것이 억울함이라고 생각한다.
억울함은 아무 때나 튀어나오지 않는다. 내 것이라 믿는 결과물이 낮게 평가될 때 나타난다. 독일과 핀란드 연구진이 2024년에 발표한 실험이 있다. 사람들은 AI가 만들어 준 글을 자기 이름으로 제출하면서도, 그 글을 자기 것으로 느끼지 않았다. 연구진은 이 현상에 AI 대필 효과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름은 올리되, 마음은 담지 못하는 상태다. 좀 더 상세히 보면, 결과물에 자신의 영향력이 크게 들어갔다고 느낄수록, 사람들은 그 글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였다. 소유감은 실제적 기여의 크기가 아니라, 스스로 기여를 인지하는 정도에 따라 움직였다. 더 오래된 연구도 있다. 2003년 미국의 한 소비자심리 연구는 사람이 컴퓨터와 함께 일할 때 좋은 결과는 자기 공으로, 나쁜 결과는 컴퓨터 탓으로 돌린다는 것을 실험으로 보여줬다.
두 연구를 겹치면, 기말 성적 공지 후 내가 경험한 낯선 상황이 조금은 설명된다. 학생에게 성적은 더 이상 자신에 대한 판정이 아니다. AI 산출물에 대한 판정이다. 자아가 빠져나갔으니, 굳이 다툴 이유도 없는 셈이다.
교실의 침묵은 예고편일지 모른다. 직장은 사정이 좀 더 복잡하다. 내 수업에서는 AI 활용을 허용하고 장려했으니, 학생들은 AI를 썼다고 드러내는 환경이었다. 그런데 직장인은 AI를 업무에 적극 활용했다고 드러내는 순간 자기 지분이 줄고, 평판이 깎일지 모른다는 압박을 받기도 한다. 2025년 미국에서 조사된 사례에서, 직장인 절반이 AI 사용을 숨긴다고 답했다. 흥미롭게도, AI를 가장 많이 쓰는 경영진이 도리어 가장 많이 숨겼다. 조사 기관은 여기에 AI 수치심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실제로는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겉으로는 온전히 내 성과인 척해야 하는 상황이다. 소유감 없는 소유권, 이런 불안한 정서 속에서 성과 평가를 받는다. 평가가 박해도 따지기 어렵다. 따지려면 작업 과정을 펼쳐 보여야 하는데, 거기에 AI의 지분이 얼마나 큰지 드러내기 두렵고, 한편으로는 그 지분의 크기를 자신조차 정확히 가늠하지 못한다.
성적에 억울해하는 학생이 사라진 이번 학기가 꽤 평화롭게 느껴진 것도 사실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의 침묵을 평화로 읽고 싶은 유혹이 생겼다. 그러나, 사라져버린 그들의 억울함이 적잖이 불편하다. 억울함은 성가신 감정이기 이전에 애착의 증거다. 성적에 항의하는 학생은 적어도 자기 답안을 다시 읽는다. 어디서 점수가 깎였는지 따지는 과정은 그 자체로 깊은 복습이다. 평가에 이의를 제기하는 직원은 적어도 자기 일을 자기 것으로 여긴다. 다툼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애착이 사라진 것이라면, 조용한 교실과 조직은 성숙해진 것이 아니다. 아무도 자기 학습, 일을 껴안지 않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껴안지 않은 학습, 일의 결과가 우리를 성장으로 이끌 수 있을지 의문이다.
나는 다음 학기 과제, 시험에서도 AI 활용을 금지하지 않을 계획이다. 결과물만이 아니라, AI와 주고받은 과정을 함께 제출하게 하고, 어디까지가 자신의 판단이었는지 좀 더 상세하게 갈라보게 하려 한다. 기업에서는 AI 사용을 숨기게 만드는 문화부터 걷어내길 바란다. 드러내면 지분이 깎이는 조직에서, 구성원은 소유감뿐만 아니라 책임감도 상실한다.
조용한 메일함을 다시 열어 본다. 고된 정정 작업에서 벗어난 안도감 뒤에 서늘한 감정이 크게 밀려온다. 다음 학기에는 그들의 억울함이 다시 소환되길 기대한다. 당신은 직장에서 어떤 일 때문에 가장 억울했는가? 억울함이 아직 남아 있다면, 그 일은 아직 당신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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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균 경희대 교수는 인지과학을 바탕으로 인간의 사고와 경험, 그리고 기술변화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해 왔다. 최근엔 AI 확산과 인간의 확장된 미래를 집중적으로 탐구했다. 저술활동 외에도 강연과 유튜브 등을 통해 기술 변화를 쉽게 풀어내며 대중적으로 폭넓은 공감과 인기를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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