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광순 박사. 그는 국내 식품업계의 산증인으로 통한다. 식품의약품 안전청의 기틀을 닦으며 수년간 공직에 몸담았다가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 교수로 후학 양성에 힘쓴 인물이다. 1998년 정년 퇴직한 이후 최근까지 수십년의 세월 동안 국내·외에서 터지는 크고 작은 식품 문제를 몸소 체험했다.
올해로 일흔여덟의 나이. 이제 일을 놓아도 될 법한데 신 박사는 최근 <과거를 보고 미래를 연다>는 책을 펴냈다. 국내 식품제도의 기틀을 세우던 초창기의 이야기, 학문적 이야기와 함께 당시의 사회상이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신 박사에게서 듣는 당시의 이야기는 자못 놀라웠다. 보건사회부 식품위생과에 재직하던 시절 온 나라를 뒤흔든 대표적인 식품 사건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롯데제과의 껌에서 검출된 철편 조각 사건은 아주 유명하죠. 재일동포인 신격호 회장이 국내에 차린 게 롯데제과인데 철편 검출 사건이 보도되자 기업을 철수하겠다고 협박까지 했죠."
신 박사에게서만 들을 수 있는 생생한 증언이었다. 현직에 있을 때 가까이에서 겪었던 일이라 더욱 똑똑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고 그는 말한다.
"결국에는 껌 철편 사건을 조사한 당시 보건사회부의 식품위생과가 중앙정보국의 조사를 받고 자의든 타의든 자백을 해야만 했어요. 고의적으로 껌에 철편 조각을 넣었다고요. 그때의 중앙정보부는 무소불위의 권력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는 책 속에서 당시 실무자들이 이 사건으로 억울하게 퇴출된 것에 대해 아쉽게 생각하고 있다고 밝힌다. 하지만 또 다른 사건에서는 그의 학문적 지식이 식품업체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콜레라가 번져 모든 빙과류 판매가 금지된 적이 있었어요. 그때 해태제과의 '브라보콘'만 판매를 허용했습니다."
당시의 아이스크림은 수공업으로 만들어 아이스박스에 팔던 '아이스케키'였다. 검사했다 하면 대장균이 득시글거릴 수밖에 없던 시절이다. 해태제과는 빙과업계 최초로 자동화 포장 시스템을 도입해 완벽히 균을 차단할 수 있었다.
"해태제과로부터 로비를 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런 건 전혀 없어요. 학문적인 양심으로 허용할 것과 허용하지 말아야 할 것을 판단했을 뿐입니다. 잘 하고 있는 제품마저 판매를 금지하는 건 오히려 양심에 맞지 않는 거잖아요."
신 박사는 당시가 '원시적인 시절'이라고 하면서도 요즘도 크게 달라진 게 없다는 의외의 말을 던졌다. 그는 우리 식품업계가 보이는 문제에만 치중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물질 사건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진짜 문제가 되는 것은 사람을 죽고 살리는 미생물입니다. 외국은 이물질 하나 나온 것쯤은 대수롭게 여기지도 않아요. 그야말로 1만개 중에 하나 나왔을 뿐이거든요."
그의 말에 따르면 이물질 사건 같이 별 것 아닌 것은 크게 떠들어 대지만 정말 위험할 수 있는 것은 조용히 덮고 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는 지금도 계속 터지는 문제에 관심을 갖고 연구한다. 최근에는 <과거를 보고 미래를 연다>의 두번째 편의 원고도 마무리했다.
"기록의 중요성 때문입니다. 제 동료들은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닌데 저라도 건강할 때 제 기억들을 모아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해요.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