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들이 판단하다시피 없다고 봅니다.”

하이닉스반도체 인수전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이종철 STX그룹 부회장은 지난 6일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하이닉스 인수에 따른 시너지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이틀 후 STX는 SK텔레콤과 함께 하이닉스 채권단에 인수의향서(LOI)를 제출했다. 이 부회장은 “M&A의 첫 번째 고려사항은 기업의 성장성과 수익성에 있다”면서 “시너지는 부차적인 사항”이라고 덧붙였다.

STX의 주력 사업은 조선과 해운이다. 반도체와의 결합으로 시너지가 발생하지 않는 분야다. 게다가 강덕수 STX 회장은 그동안 그룹의 수직계열화를 강조했던 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STX는 하이닉스 인수전에 참여했을까?

업계에서는 STX의 인수 참여를 의외로 받아들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주력사업인 조선·해운·에너지분야가 본궤도에 오른 만큼 새로운 성장동력이 필요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하이닉스 자체의 매력도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꾸준한 실적 뿐 아니라 주인 없는 상황에서 업계 2위 자리를 지켜오고 있다는 점은 하이닉스의 강점이다. 그동안 M&A를 통해 성장해온 STX그룹 차원에서는 욕심을 낼법한 매물인 셈이다.

포트폴리오 편중현상으로 인해 글로벌 조선·해운업계의 불황에 흔들릴 수 있는 구조를 갖고 있다는 점도 STX가 하이닉스 인수전에 참여한 이유다. 이른바 사업다각화다. 일각에서는 반도체 시장 역시 세계의 경기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점에서 그룹의 리스크 관리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있지만, STX는 각각의 영역이 별개로 움직이는 만큼 도움이 될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 부회장은 “현재처럼 조선·해운·기계 등 동일 사이클에 90%가량 의존하는 사업구조를, 이 분야에 30~40%만 배정하고신 나머지는 다른 분야로 구성하는 포트폴리오가 리스크 헤지 측면에서 유리하다는 시각도 있다”며 사업 구조 개편의 당위성을 설명했다.

◆경쟁사 비해 넉넉지 않은 현금

현재까지 알려진 하이닉스 인수대금은 2조5000억원 남짓. 최고 3조원이라는 이야기도 들리지만 자산 16조1440억원(4월 공정거래위원회 발표 기준), 매출 12조2950억원, 당기순이익 2조6380억원(이상 지난해 기업공시 기준)이라는 하이닉스의 실적을 감안하면 그리 높은 금액은 아닌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문제는 반도체 분야의 특성을 감안할 때 투자비용이 더 들어간다는 데 있다. 업계에서는 세계 경기 불황 등에도 버틸 수 있는 사업 유지와 신규 설비투자에 해마다 3조원 이상의 비용을 투입해야 한다고 판단한다. 지난해 하이닉스는 3조3800억원을 투자했으며 올해도 3조4000억원의 투자비용을 책정한 상태다. 향후 10년간 최대 60조원의 투자비용이 더 들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때문에 하이닉스 인수전을 바라보는 업계의 시각은 ‘STX가 과연 인수비용을 넉넉하게 마련할 수 있을까’에 집중돼 있다. STX가 보유하고 있는 현금성 자산이 3조원 정도임을 고려하면 일단 당장 ‘돈줄이 막히는 수모’는 당하지 않겠지만 인수 경쟁자가 SKT라는 점은 마음에 걸린다.

재계순위 3위인 SK그룹의 자산규모는 97조원에 이르는 반면 14위인 STX그룹은 22조원 수준이다. 이번 인수를 주도하는 SK텔레콤의 경우만 보더라도 순차입금 4조1155억원, 부채비율 86.7%인데 비해 STX의 순차입금은 7조5000억원(차입금 의존도는 46%)을 넘어섰고 458.4%의 부채비율을 안고 있다.

신용등급 역시 간극이 크다. SKT의 장기 신용등급이 AAA인 반면 STX의 장기 신용등급은 A-다. 인수 이후 STX의 전망은 더욱 어둡다. 신용평가사들은 “STX가 우선매각협상대상자로 선정되면 신용등급은 더 낮아질 수 있다”고 우려를 표하고 있다.

무리한 인수자금 조달이 그룹 전체의 위기까지 몰고 올 수 있다고 해석되는 대목이다. 흔히 이야기하는 ‘승자의 저주’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STX가 하이닉스 인수전에 참여하겠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STX 계열사의 주식이 연일 하락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것도 무리한 인수합병이라는 시각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해외펀드+계열사매각, “실탄, 걱정없다”

이 부회장은 하이닉스 인수전에 임하는 각오에 대해 “결코 무리하지 않겠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경쟁사와의 가격입찰 경쟁을 벌이기보다는 기업실사를 통해 꼼꼼히 따져본 뒤 본입찰에 들어가겠다는 전략이다. 무차입 인수를 선언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STX는 자금 충당을 위해 중동 국부펀드와 51대 49 형태의 컨소시엄을 구성해 참여하는 방법을 택했다. STX가 경영권을 갖는 대신 재무적투자자(FI)는 경영에 대한 감독권을 갖는 식이다. 지금까지는 아부다비 국부펀드의 참여가 유력하다.

투자금액 확보를 위해 우량 계열사 매각도 STX가 고려하고 있는 카드 중 하나다. 이 부회장은 “실사를 거쳐 인수를 결정하게 된다면 우량 기업, 그러니까 시장에서 사고 싶은 물건 순으로 처분할 계획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 부회장의 발언을 토대로 STX그룹의 매각 가능성이 큰 매물은 STX에너지와 STX중공업. 이들의 순자산가치는 각각 3398억원과 2912억원이다. 그룹은 두 자회사의 상장 전 자금유치(Pre-IPO)를 통해 하이닉스 인수대금 중 일부를 마련할 수 있다.

STX에너지의 내부지분율은 93.5%에 이른다. STX와 STX조선해양이 각각 47.4%와 17.6%를 가지고 있고, STX에너지가 28.5%의 자사주를 보유하고 있다. 또 STX중공업은 STX조선해양이 94.0%의 지분을 갖고 있는 등 계열사가 100%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두 곳의 지분매각 가능성이 높은 이유다.

한편 STX는 이번 인수전 평가에서 증권업계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있다. 모든 초점이 SKT에 맞춰진 탓이다. 그만큼 시장에서 STX의 인수 가능성을 낮게 평가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인수전  이후 외국인의 STX 매수량은 이틀새 11만7000주 24억7000만원이 늘었다. 반면 SKT는 같은 기간 600억원 가까이 빠졌다. 하이닉스 인수가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평가는 양사에 마찬가지로 적용되지만 결국 인수전 승자는 SKT로 무게가 실리고 있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