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7월 어느날, 삼성전자 모 임원은 UI 개발 직원 10여명을 소집해 지시를 내렸다. 2007년 6월 애플이 아이폰을 세상에 처음 선보인지 한달쯤 지난 시기였다. 스마트폰이 국내에 상륙하기 전인 2008년, 삼성전자가 내놓은 ‘햅틱폰’의 탄생 비화다. 애플이 첫 아이폰의 UI 개발에 공들인 3년의 시간과는 비교가 무색하다.
세계 트렌드를 좇아가는 우리나라 IT기업들의 기동력은 ‘IT 한국’을 성장시킨 원동력이다. 삼성전자의 갤럭시S는 애플의 아이폰을 넘어 세계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했고, 이동통신사들 또한 세계 최초로 4G LTE 상용화를 코앞에 두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IT 강국 코리아’의 그늘에는 연구개발자들의 잔혹사가 숨어있다. 한국 IT업계 특유의 공격성은 분명 강점이지만, 돌격대식 개발을 계속하다가는 향후 'IT 한국'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우려가 짙게 깔리고 있다.
◆ 사람 잡는 이통사 ‘최초’ 타이틀 경쟁
지난 11월 KT에 근무하던 직원이 돌연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KT 대구NSC(네트워크서비스센터) 서안동운용팀의 김모씨가 잠을 자던 중 정확한 사인 없이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유족들에 따르면 김씨는 평소 건강했으며, 최근 과로와 스트레스를 호소했다. KT노동인권센터의 조사 결과 올 한해 KT 재직자 가운데 숨진 이는 모두 15명. 그 중 8명이 심장마비 등으로 돌연사했다.
지난 10월에는 LG유플러스의 협력업체 직원 전모씨가 심장마비 질환으로 사망한 것으로 확인됐다. 파견근로 형태로 LG유플러스 네트워크 부산담당 업무를 맡은 전씨는 최근 LTE망 관련 작업으로 인해 과로가 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협력업체 관계자는 “심장 관련 쪽이 문제였던 것으로 안다”며 “어느 현장이든 주말 근무가 있기 때문에 업무 상관관계는 분명하지 않다”고 조심스런 입장을 밝혔다.
전씨와 함께 근무했던 동료 직원은 “최근 사망사고를 과중한 업무 때문으로만 단정짓기는 무리가 있지만 통신업체들 사이에 LTE 경쟁이 불붙으면서 직원 대부분이 과로와 건강악화에 시달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꼬집었다.
LG유플러스는 내년 상반기까지 LTE 전국망 설립을 목표로 삼고 있다. 그러나 최근 SKT가 당초 예상보다 8개월이나 앞당겨 내년 4월까지 LTE 전국망을 깔겠다고 발표하자, LG유플러스 역시 목표 날짜를 내년 3월로 재조정한 것이다. 여기에 최근 KT까지 2G를 종료하고 LTE 사업에 탄력을 붙여 경쟁은 더욱 과열되고 있다.
기업들마다 ‘최초’ 타이틀에 연연하면서, 현장의 연구개발자들이 그 희생냥이 되고 있는 셈이다. 전씨의 동료 직원은 “매일 9시에 출근해 새벽 2~3시에 퇴근하기를 주말도 없이 계속하는 중이다”며 “동료들 사이에서도 건강 이상 신호 등을 이유로 업무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 합숙도 불사…“돌격대식 신제품 개발이 창의력 막는다”
“삼성이 어떻게 한다더라 하면 토론 없이 의사 결정이 난다.” “LG전자는 혁신을 하겠다고 주장만 하는 회사다.”
지난 8월 메일 한통이 IT업계 화제로 떠올랐다. LG전자에 근무했던 한 선임연구원이 회사를 떠나며 CEO인 구본준 부회장에게 보낸 메일이었다. LG전자 연구원들을 가로막는 기업문화가 요목조목 적혀 있었다.
과열된 ‘혁신 경쟁’으로 인해 연구원들의 돌격대식 프로젝트 진행을 저당 잡는 행태는 IT업계 전반에 만연하다. 전자업체의 경우 대기업 특유의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문화가 더해지면서 현장 연구원들이 과로에 내몰리고 있지만, 정작 창의력은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날로 높아지고 있다.
대기업 전자업체에서 신제품 개발을 맡고 있는 한 연구원은 “스마트폰 대중화 이후로 돌격대식 프로젝트 진행이 더욱 횡행하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기존에는 1년에 하나씩 신제품 모델을 출시하는 등 일정한 흐름이 있었던 데다, 경쟁사의 신제품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했다. 그러나 스마트폰 출시 이후 하드웨어 스펙 싸움에 초점이 맞춰졌던 기존의 흐름이 완전히 깨졌다. 경쟁사의 신제품 출시 예측이 어려워진 데다 다양한 경쟁 제품에 대응하다 보니 단말기 출시 기간도 점차 짧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에서 근무 중인 한 연구원은 “갤럭시S1 작업 때는 초과근무가 100시간을 넘기는 경우가 다반사였고 출장 갔던 연구원이 자살을 하기도 했다”며 “그나마 올해는 갤럭시 시리즈가 자리를 잡으면서 많이 나아진 편이다. 회사에서도 최근 이 같은 문제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여유를 찾은 삼성전자와 달리 LG전자 등은 여전히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지난 3분기 LG전자의 휴대폰 전체 판매량은 전 분기보다 줄어든 2110만대를 기록, 매출이 15% 감소했다. 1년 이상 실적악화에 시달리고 있는 LG전자는 현재 스마트폰 라인업 강화에 중점을 두고 흑자전환 돌파구를 모색하고 있다.
LG전자에 근무 중인 한 연구원은 “경쟁사를 따라잡기 위해 한 달 사이에도 새로운 단말기만 3개씩 출시되는 상황”이라며 “단말기 라인업이 많아지다 보니 새벽에 퇴근하는 게 일상적이다. 출시 이후 성과라도 좋아야 하는데 아직은 기대에 못미친다”고 말끝을 흐렸다.
실제로 LG전자의 경우 스마트폰이 출시된 2년여 전부터 신제품 개발 프로젝트를 위해 협력업체를 비롯한 연구개발자들이 2~3개월 동안 오산 연수원 등에서 기거하는, 합숙 프로그램이 생겨나기도 했다. 기한 안에 집중적으로 프로젝트 일정을 맞추기 위한 시스템이다. 연구원들 사이에서는 업무 집중력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는 의견도 있지만, 돌격대식 IT제품 개발을 그대로 보여주는 시스템이라는 비판도 적지 않다.
김인성 IT칼럼니스트는 “대기업들이 경쟁사의 신제품을 뒤좇아가는 속도전에 중심을 두고 있다”며 “그러니 연구원들의 물리적 한계는 고려하지 않고 돌격대식 개발이 만연하고 있다”고 현실을 개탄했다. 미국만 하더라도 IT신제품 개발에 들어가면 연구개발자들이 중심이 돼 기한을 정하고 프로젝트를 수행한다. 이에 비해 임원진들로부터 최종기한 등이 하달돼, 연구원들은 이를 좇아 가기에만 바쁜 한국 IT업계 특유의 개발 방식이 문제라는 진단이다.
그는 “현장 개발자들이 주역이 돼야 하는데 처우 개선은커녕 건강만 악화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며 “향후 세계 IT트렌드를 주도하려면 창의력이 중요하다는 얘기를 많이 하지만, 일방통행 식으로 프로젝트를 떠안기는 방식을 계속 고집한다면 개발자들의 창의력이 발휘될 리 없다”고 쓴소리를 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