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 선릉역 인근에 위치한 주택가. 골목 어귀에 자리한 이층집 대문에 '본엔젤스'라는 간판이 조그맣게 붙어있다. 아담한 정원을 지나 집 안으로 들어가니 살림꾼 아주머니 한분이 밝은 목소리로 취재진을 맞는다. 거실 한가운데엔 커다란 책상 두개가 덩그러니 놓여있다. 계단을 따라 지하로 내려가니 차고 옆 공간을 개조한 조그만 사무실이다. 젊은 직원들이 컴퓨터 앞에 앉아 일에 몰두하는 모습이 보인다.
'한국의 실리콘밸리' 꿈이 시작되는 곳. 여기가 바로 국내 최초 엔젤투자 전문업체 '본엔젤스 벤처파트너스'의 사무실이다.
◆"기술 아닌 사람에 투자한다"
사진 류승희 기자
엔젤투자는 기술은 있으나 자금력이 부족한 초기 벤처에게 자금을 지원해주는 것을 뜻한다. 가능성 하나만으로 사업 투자를 지원해주는 일이 마치 천사와 같다 해서 붙여진 단어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통상 VC(벤처캐피탈)들이 사업 가능성을 면밀히 검토해 본 뒤 자금 지원을 결정하는데 반해 본엔젤스는 이보다 전 단계, 창업을 구상하고 준비하는 시점부터 자금을 지원한다. 엄밀히 말해 대박 아이템이나 높은 기술력에 대한 투자가 아닌 '사람'에 대한 투자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궁금증이 생긴다. 오로지 '사람' 하나만 믿고 투자를 감행한다는 것 자체가 위험부담이 큰 것 아닐까. 이 답은 본엔젤스의 시작을 거슬러올라가면 자연스레 해결된다.
본엔젤스의 장병규 대표는 검색엔진 '첫눈'을 창업해 2006년 NHN에 250억원에 매각하며 IT벤처의 성공 신화로 손꼽히는 대표주자다. 그런 그가 창업자가 아닌 투자자로 역할을 바꾼 것은 나름 계기가 있었다. 카이스트 창업 동아리 출신인 그는 이후에도 종종 후배들을 찾아 벤처 창업에 대한 고민을 주고 받았는데 이것이 자연스럽게 투자로 연결된 것이다.
알음알음 후배들을 도와오던 장 대표가 보다 적극적으로 엔젤 투자에 뛰어들기 시작한 것은 2007~2008년 무렵. 본엔젤스 파트너 3인방인 강석흔 이사와 송인애 이사 역시 이때 합류, 2010년 4월 본격적인 벤처캐피탈로 출범했다.
강 이사 역시 장 대표와 마찬가지로 아이콘랩 등 IT벤처 업계에서 오랜 경험을 쌓아온 인물이다. 따지고 보면 본엔젤스는 그 시작부터 '벤처 투자자'의 시선이 아닌 '벤처 선배'의 시선에서 후배들의 성장을 도모했다고 볼 수 있다.
◆벤처캐피탈은 이층집, 벤처 사무실은 차고에 '공생'
사진 류승희 기자
본엔젤스가 으리으리한 고층빌딩이 아닌 가정집을 사무실로 택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단순히 자금 지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투자자와 창업자가 함께 교감하며 '어울릴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판단이었다.
그러니 투자자와 창업자가 잔뜩 긴장한 채 마주앉아 그동안의 투자 성과를 따져보는 그림은 이곳에선 상상이 잘 안된다. 대신 이들은 자유롭게 함께 생활하며 수다를 떨고 밥을 먹는다. 그 와중에 사업 아이디어를 나누기도 하고 경영 고민을 털어놓고 조언을 받기도 한다. 연말이나 특별한 일이 있을 때면 조그만 정원에 불판을 가져다 놓고 삼겹살이나 바비큐를 구워 먹는다.
최근에는 아예 벤처업체 한곳이 이곳 지하실에 눌러앉기도(?) 했다. 스마트TV 소프트웨어 개발업체인 버드랜드소프트웨어의 최정이 대표가 "갈 곳이 없다"며 지나가듯 내뱉은 말에 본엔젤스 측이 망설임 없이 사무실을 내준 것이다. 지하 차고 옆 빈방에 오붓하게 자리 잡은 직원들을 위해 본엔젤스는 이곳 한쪽 구석에 화장실도 새롭게 만들어 놓았다. 버드랜드 직원들이 농담처럼 말하듯 이곳은 그야말로 미국 실리콘밸리의 '개러지(Garage) 벤처'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매드 캠프로 경험 주고, EIR로 믿음 주고
사진 류승희 기자
최근에는 단순히 스타트업(초기) 벤처업체에게 자금 지원과 경영 컨설팅을 해주는 천사의 역할을 넘어서서, 국내 벤처업계의 '새로운 생태계'를 만들기 위한 실험도 시작했다. '매드캠프'와 'EIR'이 그것이다.
미국 실리콘밸리만 하더라도 벤처 창업은 젊고 똑똑한 엔지니어 개발자들에게 유망한 분야 중 하나다. 그럼에도 국내에서는 벤처 창업을 한다고 하면 '불안한 미래'를 먼저 떠올리기 마련이다. 국내의 젊은 엔지니어들에게도 벤처 창업의 의미와 경험을 전해줄 방법이 없을까. 그에 대한 답이 바로 '매드(Mobile Application Development) 캠프'였다. 지난해 1기와 2기 캠프를 진행했고, 올해도 3기 캠프를 준비 중이다.
사실 캠프라고 하지만 따로 정해진 커리큘럼은 없다. 그저 대학생 엔지니어들에게 도전과제를 던져주고, 캠프기간 동안 이를 해결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면 충분하다. 일하는 시간에는 이곳 사무실에서 자유롭게 작업에 몰두하고, 근처 오피스텔에 숙식 장소를 마련해주면 나머지 스케줄은 모두 학생 개인의 몫이다.
캠프에 참가하는 대학생들 중에는 창업가를 꿈꾸는 이들보단 창업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참가하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그러나 과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문제에 몰두하고 해결하는 성취감을 느끼며 벤처창업의 '맛'을 보게 되는 것이다.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본 따온 EIR(Entrepreneur in Residence)은 창업자가 사업 아이템을 잡아가는 초창기부터의 투자 진행을 보다 체계적으로 시스템화한 것으로 이해하면 쉽다. 초창기 창업자는 생활비 정도의 월급을 받고 투자업체에 상주하며 아이템 결정부터 전반적인 논의를 거쳐 창업 준비를 시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최근 SK플래닛에 매각되며 이른바 '대박 벤처'가 된 매드스마트의 김창하 대표가 바로 이 EIR 1호의 주인공이다. 김 대표와 함께 팀을 꾸리고 있는 엔지니어들 역시 이곳 매드 캠프를 통해 만난 인연들이 대부분이어서 회사 이름 또한 '매드스마트'로 붙여졌다고 한다. 본엔젤스측은 현재 차기 EIR 대상자를 공개 모집, 선정 작업을 마무리 중이다.
"엔젤투자는 장학사업? '리사이클링 캐피탈' 만들 것" 강석흔 본엔젤스 이사
사람에 대한 투자는 끈기가 필요하다. 실패하더라도 기다려 줄 수 있는 여유는 기본이다. 하루 빨리 성과를 내라며 닦달하기보다는 언젠가 성과를 낼 수 있도록 격려해 주는 것이 엔젤투자자의 역할이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딱 '장학사업'이 떠오른다. 인재를 기른다는 의미에서 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강 이사는 "엔젤투자가 단순히 장학사업이 돼서는 안된다"고 못박는다.
"창업에 도전하는 후배들이 실패하더라도 얼마든지 재도전 할 수 있고, 또 성공하더라도 다시 돌아와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싶었어요. 단순히 일회성 자금 지원만으로는 산업적 의미를 가질 수 없어요. 수익을 창출해야 돈이 순환되고 벤처 생태계가 만들어지는 거죠."
실제로 그의 말마따나 지금껏 본엔젤스의 투자 성과는 꽤 높은 편이다. 최근 SK플래닛으로 매각된 틱톡 개발업체 매드스마트는 3억5000만원을 투자해 15배가 넘는 수익을 거둬들였다. KT로 매각된 엔써즈 역시 30억원의 투자 수익을 남겼다. 이외에도 스픽케어, 배달의 민족 등 점찍었다 하면 대박 행진을 이어가고 있으니 본엔젤스는 업계 '미다스의 손'으로 등극한지 오래다.
본엔젤스가 이처럼 수익창출을 강조하는 데는 또 다른 꿈 때문이기도 하다. '리사이클링 캐피탈'. 벤처 1세대의 성공 신화인 장 대표가 지금 후배들을 엔젤투자로 지원하고 있는 것처럼 지금 본엔젤스의 투자를 받고 있는 벤처업체들이 성장한 뒤 다시 후배들을 위한 투자로 연결되는 선순환 구조를 말한다.
"지금 좋은 성과를 내고 있는 매드스마트 같은 업체들이 향후 우리쪽에 자금을 지원하고 투자자로 참여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도 그 업체들의 투자수익으로 다른 투자를 진행하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간접적인 투자가 이뤄지는 거나 마찬가지죠. 중요한 건 투자가 돌고 도는 리사이클링 고리를 만드는 겁니다."
본엔젤스가 투자 대상자를 선정할 때 무엇보다 '사람'을 중요하게 보는 것 역시 이와 무관치 않다. 과거의 화려한 이력이나 높은 기술력, 뛰어난 아이템은 결정적인 기준이 아니다.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눈 뒤 밑바닥까지 그 사람을 파악하고, 본엔젤스의 파트너 3인방이 만장일치로 찬성해야만 비로소 본격적인 투자가 진행된다.
"창업자에 대한 확신만 있다면 혹여나 실패하더라도 재도전해 일어서는 건 얼마든지 기다려줄 수 있습니다. 다만 그 기간 동안 우리와 함께 호흡하고 생활하며 서로의 뜻을 맞춰갈 수 있는지를 보는 거죠."
투자자와 창업자가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다 보니 최근에도 본엔젤스 인근을 중심으로 투자업체들이 사무실을 마련하는 일이 적지 않다고 한다. 미국 벤처 생태계의 중심에 실리콘밸리가 있듯 실제로 최근 강남 지역에 벤처 업체들이 하나둘 모여들며 '강남밸리'의 시작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벤처 생태계. 그 꿈을 향해 한발 한발 나아가는 본엔젤스의 도전이 만들어갈 우리 벤처업계의 미래가 기대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