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3월, 미샤는 모던 팝 아트계의 신예 김지희 화가와 봄·여름 콜라보레이션(협력) 한정판 '미샤 위드 김지희'(MISSHA with Kim Jihee) 라인을 출시했다.

아트 섀도우, 아트 루즈 등 총 9가지 콜라보 제품을 한정판으로 출시했는데 불과 수개월 만에 모두 소진됐다. 미샤가 김 화가를 첫 문화 마케팅 주인공으로 선택한 이유는 20대 화가로는 드물게 아트시장에서 파격적인 행보를 이어가고 있어서다.
 
미샤 측은 그와 손을 잡으면 화가와 기업 모두 높은 시너지를 낼 수 있다고 판단했다. 예상은 적중했다. 그와 손잡고 출시한 제품이 전년도 봄·여름 콜라보 제품에 비해 무려 35%나 더 팔리는 성과를 거둔 것.
 
감수성이 풍부하고 유행에 민감한 여성들의 전유물인 화장품. 김 화가의 작품은 어떤 매력으로 까다로운 여성의 감수성을 파고들었을까.







사진_류승희 기자
 
◆현대인의 이중적인 메시지를 표현
 
화려한 색감, 얼굴의 절반 크기의 안경, 빨간 립스틱을 칠한 입술이 환한 웃음을 띠고 있다. 안경과 머리는 온통 샤넬과 루이비통, 페라리, 아르메스 등 명품로고로 장식했다. 금방이라도 빠져들 것 같은 오드아이(양쪽 눈의 색이 다른 것)는 소용돌이 같은 신선함을 준다.
 
하지만 그림 속 주인공의 표정이 왠지 어색하다. 화려한 치장을 한 채 밝은 웃음을 짓고 있지만 하얀 치아에 드러난 교정기, 무언가 묘하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웃음에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김지희 화가는 얼굴에 내재된 이중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다고 한다.
 
"솔직함을 말해주고 싶었어요. 겉으로는 명품을 소유한 채 밝은 미소를 짓는 척 하지만 안경 속의 눈은 울고 있거든요. 크고 화려함은 자신의 슬픔을 감추기 위한 도구에 불과해요. 일종의 가면이죠. 벼랑 끝에 서 있지만 스스로 외적인 가치를 통해 만족하는 척 하는 진정성 없는 웃음을 표현한 겁니다."
 
그림에서 보여지는 '성조기'와 'I♥NY'은 서구를 맹목적으로 동경하는 인식을, 토끼와 양의 이미지는 생존을 위해 착한 모습으로 둔갑하거나 위장한 표정을 꼬집는다.
 
다양한 그림을 통해 조합된 문장 'Money is not the only answer, but it makes a difference'(돈이 유일한 해답은 아니지만 차이를 만들어 낸다)는 보는 이로 하여금 서글픔을 느끼게 한다. 하얀 치아를 꽉 조여 가지런하게 만드는 교정기는 억압과 고통이 반복된 그의 경험에서 나온 표현이다.
 
"스무살이 넘어가기 전까지 덧니가 있거나 치아가 삐뚤지 않았지만 더 예쁜 입술과 턱선을 갖기 위해 때 늦은 철길을 단단히 부착했더랬다. (중략) 당시 교정기는 나에게 획일적인 기준에 의해 자신을 끼워 맞추는 고통을 감내하며 억지웃음을 짓는 억압의 장치였다. 눈물이 고인 눈에 고독을 감추고 교정기가 장착된 치아를 드러내며 웃고 있는 인물의 형상은 획일적인 가치 기준을 요구하는 사회에 대한 고발이자 위장된 자아, 그 페르소나(외적인격)에 갇혀버린 현대인의 섬뜩한 자화상이었다."(김지희 작 <그림처럼 사는>에서 발췌)
 
기업과 대중이 그를 주목한 이유는 가면에 감춰진 혼란의 미학, 비극적인 미소가 담긴 불편한 진실이 통했기 때문이다. 눈으로 보면 아름다우면서도 즐거운,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를 반성할 수 있는 진실의 거울이 무언의 충고를 준다. 어쩌면 우리사회가 불편한 메시지에 목말라 했을지도 모른다.
 
김종근 미술평론가는 그의 작품에 대해 "여류작가의 작품에서 오늘을 사는 고독한 현대인, 곧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은 행운"이라고 평했다.



미샤 봄.여름 콜라보레이션 ‘MISSHA with Kim Jihee’ 라인 한정판 메이크업 세트

◆사랑에 목마른 순수한 여자
 
그림에 대한 욕심이 많은 만큼 김 화가의 프로필도 화려하다. 이화여대에서 동양화를 전공(미술사학부 부전공)했고 동 대학원 석사 출신인 그는 지금까지 국내·외에서 100회의 전시회(개인전 6회)를 열었다. 2011년에는 11회 창작미술상을 20대 최초이자, 역대 최연소로 수상하기도 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영화, 드라마 협찬, 페라리, 미샤(에이블씨엔씨), 우리자산관리를 비롯해 유명기업의 갤러리와 개인 컬렉터가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수년간 미술전문지 편집팀장을 맡았고 미술칼럼니스트로서 다양한 잡지에 기고도 한다. <그림처럼 사는>, <삶처럼 그린> 등의 에세이 집을 출간해 4주 만에 교보문고 베스트셀러에 진입하기도 했다.
 
주변의 지인들은 그를 '악바리'라고 부른다고 한다. 머리에는 온통 그림에 대한 생각 뿐이며, 노력만이 살 길이라고 믿는다. 고등학교 입학 두달을 남기고 불쑥 예고에 가겠다며 부모를 설득해 당당히 합격한 일. 9시 수업을 시작하면 늦어도 새벽 5시에 등교해 그날 그림을 미리 그리는 치열함. "지희는 입시에서 중요한 국화가 부족해"라는 미술 교사의 말 한마디에 20시간 동안 식사도 거른 채 수천송이의 국화를 그린 끈기가 이를 증명한다. 그는 결국 선생님으로부터 "이제 보니 지희는 국화를 제일 잘 그리네"라는 칭찬을 받았단다.
 
초등학교 시절 근사한 단어들로 장식된 어른들의 문체를 동경해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했던, 결코 순수해 보이지 않을 어른스러움. 마음에 드는 문체나 내용이 있는 책을 외울 때까지 읽는 독서습관은 그 시절부터 시작됐다고 말할 땐 섬뜩함마저 들었다.
 
샤넬을 동경하지만 프라다를 입을 것 같은 여자. 조금은 깐깐하고 냉혈적인 느낌을 주는 화가. 하지만 그를 만나면 모든 게 편견이라는 것을 쉽게 깨닫게 된다. 오히려 그는 누구보다 고독하며 외로움을 많이 타는 순수한 열정파다. 그리고 늘 사랑에 목말라 있음을 간접적으로 표현한다.
 
"붓이 종이에 처음 닿던 기분은 마음의 멍울을 터뜨려 사랑한다고 말하는 최초의 고백"이라고 수줍게 밝히는 김지희 화가. 열번을 태어나도 예술가로 살고 싶다는 그가 앞으로 세상에 어떤 메시지를 던질지, 그리고 어떤 사랑을 통해 대중과 함께 호흡할지 기대되는 이유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267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