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이하 장차법)이 마침내 지난 11일자로 확대 시행됐다. 이에 따라 국내 모든 법인을 대상으로 장차법이 시행된다. 그러나 국내 증권사들은 장차법에 대한 준비가 미진해 소송을 당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물론 장차법을 어긴다고 해서 법적인 제재를 받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장애인 등이 차별을 받는다고 인식해 소송을 제기할 경우 거액의 배상을 해야 하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다.

실제로 이미 장차법과 비슷한 법률이 시행되고 있는 해외에서는 장애인단체로부터 기업이 소송을 당해 거액을 배상한 사례들이 있다. 지난 1902년 설립된 미국 유통업체 타깃은 웹사이트인 'target.com'이 웹접근성 의무를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2006년 초 국립시각장애인연합(NFB)으로부터 소송을 당했다. 결국 이 회사는 NFB와 600만달러(약 70억원)를 배상하는 데 합의하고 법적분쟁을 마쳤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장애인 차별과 관련된 소송이 발생했다. 지난해 11월29일 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와 참여연대 등은 "시각장애인에게 인터넷 접근성을 보장하라"며 대한항공, 서울도시철도공사,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 한전병원 등 4곳을 상대로 서울중앙지법 등에 시각장애인 10명을 대신해 소송을 제기한 바 있다.

이처럼 국내에서도 장애인들의 소송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지만 증권사들은 심각할 정도로 여유로운 상태다.

◆5년 지났는데 아직도 "시간 부족" 타령

그렇다면 증권업계의 현재 준비상황은 어느 정도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아직도 멀었다.

업계에 따르면 현재까지 웹트레이딩시스템(WTS)이나 홈트레이딩시스템(HTS), 모바일트레이딩시스템(MTS) 등 웹 기반 주식거래 플랫폼에 음성지원시스템 등 장애인 편의장치를 보완한 곳은 삼성증권, 대우증권, 대신증권, 한화투자증권, HMC투자증권 등 소수에 불과하다.

대우증권은 지난 11일 시각장애인이 화면 내용을 음성으로 들을 수 있는 스크린리더 프로그램을 지원하는 회사소개와 WTS를 새롭게 오픈했다. 또한 대비가 큰 색을 조합하거나 기호 등을 사용해 색맹 또는 색약이 있는 투자가도 웹 콘텐츠를 쉽게 식별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WTS에는 소프트웨어 기술등급을 갖춘 장애인전문가들의 컨설팅과 검증을 거쳐 누구나 쉽게 활용할 수 있는 화면(easy Mode)을 별도로 개발해 업계 최초로 WTS에 대해 '웹접근성 인증마크'(WA)를 획득했다.

홈페이지만이라도 개편한 회사들이 있긴 하나 업계 전반적으로 살펴보면 아직 홈페이지조차 바꾸지 못한 회사들이 적지 않다.

A증권사는 오는 5월1일 개편한 IR사이트를 오픈할 예정이지만, 웹접근성을 강화한 홈페이지는 현재까지도 개발 중이다. B사도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보안카드나 증권매매수수료 할인 등의 서비스를 시행하고 있지만 웹접근성 확보를 위한 작업은 아직 진행 중이다.

한 증권업계 관계자는 "시간이 모자라 아직 이를 적용하는데 어려움이 있다"고 말했다. 법안이 공표되고 5년이나 지났는데도 시간이 부족한지 묻자 이 관계자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지난 11일이 장차법이 최종적으로 시행되는 날임에도 불구하고 적잖은 증권사들이 이날을 기준으로 유예기간이 주어질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등 심각한 수준이다.

◆어쩌다 이런 상황까지 치달았나

증권업계가 장차법 시행과 관련해 오락가락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아무도 모르고 신경도 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2008년에 설립된 한 증권사 관계자는 장차법과 관련해 "설립됐을 때부터 신경 써서 만들었다면 괜찮았을 텐데 어째서 돈을 두번이나 들이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 법이 지난 2008년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같은해 설립된 증권사들조차 이법을 '몰랐기 때문'에 두번이나 돈을 들이고 있는 것이 현재 증권업계의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융투자협회는 회원사인 증권사에게 장차법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에 대해 도움을 거의 주지 못했다. 최근에서야 관련 공문을 하나 배포한 것이 전부다. 금융투자협회 증권지원부는 지난 3월6일 장차법 적용과 관련, 회원사에 도움을 주기 위해 보건복지부에 질의한 뒤 그 결과를 업계에 배포했다.

금융투자협회 관계자는 "증권업계에서 수십건의 전화가 걸려오는 등 문의가 많았다"면서 "사람들이 모르고 있어서 대응을 어떻게 해야 할지 우왕좌왕하는 감이 짙었다"며 복지부 질의결과 공문을 배포한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나 금융투자협회는 장차법 시행을 코앞에 둔 지난 3월6일에서야 질의회신 공문을 배포했을 뿐 이외에 별다른 가이드라인을 보내거나 하는 일이 없었다.

금융감독당국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금융감독원 IT감독국 IT총괄팀이 지난 3월24일 작성한 '금융회사의 장애인에 대한 전자금융서비스 이용편의 제고 추진현황'을 살펴보면 이행을 독려하기 위해 은행과 보험 등에 대해서는 CEO·CIO 간담회 시 적극적으로 추진하도록 독려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타 금융권과 달리 증권업권만은 간담회 날짜 자체도 명기돼 있지 않았다.

금융감독원의 한 관계자는 증권사도 은행의 오픈뱅킹과 같은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질문에 "증권은 뱅킹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아도 된다"고 답하기도 했다. 당국조차 장차법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다는 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그렇다면 이번 장차법 시행을 통해 증권업계가 대량의 소송을 당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익명을 요청한 한 변호사는 "소송을 제기하려면 고의성이 있는지의 여부를 따져봐야 하고, 현 상황에 장차법상의 예외조항 등을 감안해야 한다"며 "현 시점에서는 (당장 증권사들이 소송을 당할 것이라고)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증권업계가 소송으로부터 자유로우려면 웹접근성뿐만 아니라 다른 부분에서도 노력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고 덧붙였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277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