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는 자식이 결혼하면 분가하지 않고 부모님과 함께 살면서 부모님이 손주를 대신 키워주는 가정이 많았다. 손주가 할머니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다보니 엄마보다 할머니에 대한 정이 더 깊은 경우도 흔했다.
하지만 점차 개인주의가 확산되고 대가족제도가 붕괴되면서 조부모가 손주를 키워주는 집이 크게 줄었다. 신세대 부모들의 육아방식이 조부모와 달라 조부모가 손주를 대신 키워주겠다고 해도 거절하거나 조부모 역시 손주를 맡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것.
그러다 최근 맞벌이가정이 늘면서 추세가 다시 바뀌었다. 통계청과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맞벌이가구 중 조부모가 아이를 키우는 비율이 2009년 33.9%에서 2012년 50.5%로 크게 늘었다.
지난 7월30일 엠브레인트렌드모니터가 '황혼육아'(조부모육아)에 대해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맞벌이부부의 자녀를 양가 중 한쪽 부모가 양육하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이다'라는 문항에 50대 이상 연령층의 54.8%가 동의했다. 반면 동의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16.0%에 그쳤다.
◆보모에 비해 턱없이 낮은 용돈… 개념 바꿔야
이처럼 황혼육아를 받아들이는 비율이 증가하는 이유는 복합적이지만 그 중에서도 경제적인 문제가 크게 작용한다. 딸 가진 부모는 딸이 결혼 후에도 계속 사회생활하기를 바라고, 아들 가진 부모는 자식이 빨리 경제적으로 안정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딸이나 며느리가 사회생활을 계속할 수 있도록 손주를 키워주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를 부모에게 맡길 때 양육비(용돈)는 얼마나 주는 걸까. 올해 실시한 조사를 보면 '형편상 용돈을 드리지 못한다'는 비율이 15.8%로 예년보다 크게 줄었다. 또한 월 29만원 미만이라고 응답한 비율도 12.3%로 낮아졌다. 반면 30만~39만원(14%), 40만~49만원(12.3%), 50만~59만원(21.2%)의 비율은 늘어났다.
이같이 황혼육아의 대가로 부모에게 주는 용돈이 전반적으로 늘긴 했지만 보모(매달 140~150만원)에게 주는 돈에 비해서는 절반 이하로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부모에게 매달 120만~129만원(5.3%), 130만원(7.0%)을 육아비용으로 준다는 응답자도 있는데 이는 보모에게 지급하는 금액과 비슷한 수준이다.
부모에게 주는 육아비용이 적은 경우는 저소득계층이어서 부부가 함께 돈을 벌어야만 하거나 부모가 비교적 젊어 아이를 맡기기에 양호한 상황일 때 등이다. 하지만 경제상황이 그다지 어렵지 않은 데도 양육비를 적게 주는 가정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형편상 지출을 한푼이라도 줄이는 것이 절실한 경우라면 모를까 자신들은 소비를 할만큼 하면서 육아라는 힘든 일을 맡은 부모에게 용돈을 적게 주는 것이라면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특히 부모들은 육아의 대가로 자식이 준 용돈의 일부를 손주를 위해 사용하거나 어떤 형태로든지 다시 자식에게 돌려줄 가능성이 크다는 점도 명심해야 한다.
◆깐깐해진 요구사항에 갈등 증폭… 국가가 개입할 때
대가족으로 살던 시절에는 고모나 삼촌 등 다른 식구들이 아이 보는 일을 함께 도와줬기 때문에 할머니, 할아버지가 손주를 키우는 일이 힘들지 않았다. 아이도 편하게 키웠다. 하지만 요즘은 아이 돌볼 때 신경 쓸 일이 많아졌다.
그러다보니 부모에게 육아를 맡기면서 우유 먹이는 시간과 양, 낮잠 재우는 시간 등 요구사항이 늘어난다. 유기농 음식만 고집하기, 아이 버릇 길들이기 등에서 세대간 사고방식의 차이로 인한 갈등도 생겨난다.
조부모 300여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황혼육아 실태조사(2012년 경기도가족연구원)에 따르면 39.7%의 노인들이 양육방식의 문제로 자녀와 갈등을 빚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황혼육아를 맡은 조부모들은 하루 9시간, 일주일에 평균 47시간씩 중노동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몸에 이상이 생겨도 노환으로 인한 자연스런 현상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실제로는 육아 때문에 더 심해지고 악화되는 속도가 빨라지는 경우도 많다.
손주를 돌보는 노인은 종종 손목이나 허리, 무릎 질환으로 고생한다. 아이를 반복해 안다가 손목관절에 손상을 입는 것이다. 또 나이가 들면서 허리디스크의 퇴행이 진행되는데 아이를 안을 때 아이 체중의 하중이 허리에 가해지면서 퇴행성 척추 통증 및 척추관협착증 증상이 악화되기 쉽다.
아이 체중의 하중은 무릎에도 전달돼 무릎 안의 연골파열, 인대손상의 위험성이 커지고 퇴행성 관절염이 심해질 수도 있다. 황혼육아로 인해 관절과 척추에 통증을 호소하며 병원을 찾는 비율이 실제로 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육아에 시달리는 노인들은 심혈관계에도 문제가 생기기 쉽다. 미국 하버드대 보건대학원 연구팀이 매주 9시간 이상 손주를 돌본 60세 전후 노인 1만3392명을 조사한 결과 심장병 발병률이 동년배의 다른 노인들보다 55%나 높게 나타났다. 육아로 인한 만성적인 스트레스와 육체피로로 인한 호르몬 작용이 노화되는 심혈관계에 질환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정신적으로는 우울증이 오기도 한다. 지난해 대구에서는 첫째 손주를 돌보며 우울증을 호소하던 시어머니가 둘째를 임신한 며느리를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최근 국립국어원은 신조어로 '손주병'을 선정했다. 손주병이란 황혼육아로 육체·정신적 증세를 얻은 상태를 일컫는다.
우리나라는 맞벌이부부가 늘어남에도 아이를 믿고 맡길 보육시설이 태부족인 상태다. 반면 일본은 맞벌이부부 중 조부모에게 양육을 맡기는 경우가 만 2세 이하 아이일 경우 17%, 만 3세 이상은 10% 미만으로 나타났다(2010년 일본 후생노동성 조사). 우리나라보다 매우 낮은 수치다. 그 이유는 비교적 믿고 맡길 만한 보육시설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자녀양육이 개인의 문제를 넘어 국가차원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로 인식돼 시설과 제도가 충분히 뒷받침된다면 황혼육아로 인한 부작용은 훨씬 줄어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