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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거제시 장목면에서 1931년 태어난 YS는 영남권을 대표하는 민주화의 리더로 DJ는 호남권의 정치 거물로 각각 민주화의 토대를 구축했다.
두 정치계의 거목은 1969년 '40대 기수론'을 내걸었고 1971년 신민당 대권 경선에서 처음 맞붙었다. YS는 1차 투표에서 1위를 차지했지만 2차 투표에서 DJ에 역전패했다. 이후 YS는 DJ의 선거를 묵묵히 도왔고 함께 유신반대 투쟁에 나섰다.
또한 두 사람은 유신의 종식 이후 정국은 '서울의 봄'으로 흘려갔지만 서로 눈치만 보다 기회를 놓쳤다. 1980년 신군부에 의해 탄압을 받을 당시 민주화의 동지로 함께 투쟁했다. DJ는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석방돼 미국으로 망명했고 YS는 가택연금을 당했다.
YS는 1983년 5·18 광주항쟁 4주년을 맞아 단식투쟁에 나섰다. YS는 23일간의 단식투쟁으로 가택연금 해제를 얻어냈다. 이는 민주화추진협의회 결성, 신당 창당 등을 거쳐 6·10항쟁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YS와 DJ는 함께 대통령 직선제를 실현하는 쾌거를 이뤘다. 하지만 1987년 대선 당시 두 사람은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면서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대권을 빼앗겼다.
YS는 1990년 1월22일 통일민주당 총재로 민주정의당과 신민주공화당과 3당 합당을 거쳐 1992년 DJ보다 먼저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에 보수성향의 여권세력과 '야합'을 했다는 변절시비가 끊이지 않았다.
최초의 문민정부였다. YS와 DJ는 이 일로 '물과 기름' 같은 관계가 됐고 DJ는 잠시 정계를 떠났다. 대통령에 당선된 후 YS는 금융실명제와 공직자 재산공개제도를 도입하고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을 수사하는 등 경제와 정치 민주화를 추진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군 평시작전통제권 회수, 최초 남북정상회담 합의와 추진도 이 시기에 이뤄졌다. 다만 YS는 IMF 금융위기를 초래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DJ는 DJP연합을 통해 1997년 YS에 이어 대통령이 됐고 IMF 위기를 극복했다.
YS와 DJ는 영호남 지역주의를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두 사람의 화해는 2009년 DJ 서거를 앞둔 시점에서야 이뤄졌다. 이들의 화해는 영호남으로 갈린 한국 정치사에 이들이 마지막으로 함께 남긴 유산이었다.
당시 "이제 화해한 것으로 봐도 되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YS는 "이제 그렇게 봐도 좋다"고 말했다. 덧붙여 "(DJ는) 나하고 가장 오랜 경쟁관계이자 협력관계"라며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특수관계"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한편 YS는 끝까지 박정희 정권과 화해하지 않았고 박근혜 정부에 대해서도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YS의 아들 현철씨 역시 지난 대선에서 사실상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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