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도 순성(巡城)놀이라는 것이 있었다. 새벽에 도시락을 싸들고 5만9500척(尺)의 전 구간을 돌아 저녁에 귀가했다. 도성의 안팎을 조망하는 것은 세사번뇌에 찌든 심신을 씻고 호연지기까지 길러주는 청량제의 구실을 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현재 서울은 도성을 따라 녹지대가 형성된 생태도시의 면모를 보여주기에 충분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복원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해설은 과거와 현재의 대화다. 수년간 한양도성을 해설한 필자가 생생하게 전하는 도성 이야기를 소개한다. <편집자주>


사진=이미지투데이

인왕산 제2봉인 벽련봉 남쪽 중턱에는 ‘치마바위’가 있다. 크고 넓적한 바위가 치마처럼 쫙 펼쳐진 이곳은 중종과 그의 아내 단경왕후의 서글픈 사연이 서려있다.

연산군을 폐위시킨 중종반정의 주역 박원종과 성희안 등은 거사 전 당시 좌의정이었던 신수근을 만나 반정에 참여할 것을 종용했다. 그의 사위인 진성대군을 왕으로 옹립하려면 먼저 포섭해야 할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산군의 처남이었던 신수근은 반정세력 참여를 거부했다. 새로운 왕의 장인이 되느냐 현재의 위치를 지키느냐의 기로에서 고민했을 것이다. 결국 중종반정이 성공하며 반정에 참여하지 않은 신수근은 역적으로 몰려 처단됐다.


문제는 중종의 왕후가 된 신수근의 딸, 즉 단경왕후의 처리였다. 후환이 두려웠던 반정공신들은 ‘역적의 딸은 왕비가 될 수 없다’는 명분을 앞세워 신씨를 친정으로 돌려보냈다. 친정은 인왕산 밑에 있었다. 왕이 되기 전 진성대군 시절 금실이 좋았던 중종은 폐비가 그리울 때마다 경회루에 올라가 인왕산 아래 신씨 집 쪽을 바라보곤 했다. 이 소식을 듣고 신씨는 자신을 보고 싶어 하는 중종의 마음을 달래려고 신혼 때 즐겨 입던 다홍치마를 매일 치마바위에 널었다는 얘기가 있다.

◆탕춘대성과 황학정

인왕산 정상에서 창의문 방향으로 내려가면 북쪽으로 난 능선을 따라 또 다른 성곽이 북한산으로 이어진다. 인왕산 제2봉 벽련봉의 ‘기차바위’라고 부르는 능선이 성의 시작이다. 탕춘대성은 거기서부터 북한산 향로봉까지 약 5km 이어진다. 이 성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도성 북서쪽지역의 방어가 취약하다는 것을 알게 된 숙종이 재위 44년(1718)부터 쌓기 시작했다.


세검정 일대에 세운 ‘홍지문’과 성문 바로 옆으로 흐르는 홍제천 위에 설치된 오간수문은 탕춘대성의 일부다. 숙종 45년(1719) 완성된 홍지문과 오간수문은 1921년 홍수로 무너졌던 것을 1977년 복원했다. 도성과 탕춘대성이 갈라지는 곳에서 성 밖으로 나오면 태조, 세종, 숙종 때의 성곽과 최근 복원된 성곽까지 모두 볼 수 있다.

무악동고개를 넘어 인왕산 기슭의 포장도로를 따라가면 스카이웨이와 마주치는 삼거리에 두번째 초소가 나온다. 거기서 우회전해 사직단 쪽으로 스카이웨이를 따라 300m쯤 내려간다. 그곳 길가에 등과정(登科亭) 터라는 표지석이 나오고 그 아래로 유서 깊은 활터가 보인다. 황학정이다.


정자라고 하기에는 제법 큰 한옥이 자리 잡았고 사대(射臺)뜰에서 동남쪽으로 145m쯤 떨어진 정면에 과녁이 있다. 원래 이곳은 서촌의 ‘오사정’ 가운데 하나인 등과정 터였다. 지금은 종로구 사직로 9길 15-32번지로 1974년에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5호로 지정됐다.

이 사정은 처음 광무 3년(1899) 고종황제가 활쏘기를 장려하려고 7000여량의 내탕금을 들여 경희궁 ‘회상전’ 북쪽에 신축했다. 청국, 일본, 러시아 등 호시탐탐하는 외세를 맞아 상무정신을 고취하고자 고종황제가 황학정에 나와 친히 활을 쐈고 이후 전국에서 유명한 활터가 됐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사정의 기능은 멈췄고 1922년 경성중학교를 짓기 위해 경희궁 건물들을 일반에게 매각했을 때 황학정을 사들여 현재의 자리로 이건했다. 황학정은 현재 국궁계의 상징적 역할을 하고 있다.

다시 스카이웨이로 올라와 창의문 쪽으로 가다 보면 동남쪽으로 청운동이 있다. ‘청풍계’라는 계곡과 ‘백운동’이라는 지명이 합쳐져 현재의 청운동이 되었다. 사시사철 맑은 바람이 불고 맑은 물이 흐르는 청풍계와 함께 흰 구름이 떠도는 백운동의 수려한 자연환경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조선 때 백운동은 도성에서 5대 명승지로 꼽혔다. 지금은 주택이 들어차 옛날의 명성을 떠올릴 수가 없다. 다만 겸재가 그린 ‘백운동도’를 통해 당시의 모습을 살필 수 있을 뿐이다.
수성동계곡 기린교 /사진제공=허창무 한양도성 해설사

◆인왕산 수성동 계곡

수성동 계곡은 인왕산 남쪽 기슭의 첫번째 계곡이다. 청계천 지류의 발원지로 커다란 바위 사이로 흐르는 물소리가 그윽하고, 흐르는 물이 아름다워 ‘수성동’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수성동은 서울의 대표적인 경승지로 조선 후기 문예활동의 중심지였다.

겸재 정선은 ‘수성동’이라는 그림을 남겼는데 그림에 나오는 돌다리 ‘기린교’가 인상적이다. 기린교를 건넌 세 사람의 선비와 동자 하나가 걸어가는 모양이 한가롭다. 이 다리는 도성 안에서 유일하게 원위치에 원형으로 보존됐다.

‘송석원시사’는 중인 계층 문인들이 결성한 시사(詩社)다. 수성동과 그 주변에서 자주 시회(詩會)를 열었고 ‘송석원’은 ‘옥계시사’의 맹주 천수경이 살던 집터다. 지금의 옥인동 일대다. 이들과 함께 활동했던 박윤묵은 ‘송석원기’에서 이렇게 썼다.

“송석원은 옥류동의 북쪽에 있다. 푸르게 우거지고 서리서리 얽힌 소나무가 벼랑을 따라서 둥글게 줄지어 있어서 그 깊이를 헤아리기 어렵다. 또 높이 몇 길쯤 되는 바위가 우뚝하게 벽처럼 서 있어서 바라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사랑스럽게 한다. 천수경 노인이 그 자리에 오두막을 짓고 스스로 호를 송석이라 했다. 두건을 벗어 이마를 내놓고 소나무를 어루만지며 옷을 풀어 헤치고 바위를 베개 삼아 누웠다. 날마다 문인제자들과 더불어 시를 읊조리며 느긋하게 노닐다가 장차 늙어죽을 듯이 했다. 이것은 좋아하는 바를 돈독하게 한다고 말할 만하다.”

수성동의 지형과 경관은 1971년 이 자리에 옥인시범아파트를 지으면서 심각하게 훼손됐지만 2010년 서울시에서 아파트를 철거하고 옛 모습에 가깝게 정비했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531호(2018년 3월14~20일)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