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항공 경영 정상화 촉구 집회. /사진=머니투데이 홍봉진 기자

조현민 대한항공 전 전무의 ‘물벼락 갑질’ 사건이 발생한 지 한달이 넘었다. 대기업 오너 3세의 황당한 사건에 많은 국민이 분노했다. 조 전 전무 사건은 경찰 조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돼 일단락되는 분위기지만 대한항공 직원들은 그동안 쌓였던 울분을 쏟아내고 있다.

직원들은 저항을 상징하는 ‘브이포 벤데타 가면’을 쓰고 거리로 나섰다. 그들의 요구사항은 조양호 회장을 비롯한 조현아, 조현민, 조원태 등 대한항공 총수 일가의 퇴진이다. 대한항공 직원 수천명이 물밑에서 힘을 모아 총수 일가 퇴진을 요구하게 된 것은 조 전 전무의 갑질 때문만이 아니다. 대기업 오너라는 방벽에 가려졌던 폭행, 폭력, 갑질 사례가 둑방 터지듯 쏟아지는 것을 보면 그동안 쌓인 ‘을’의 설움을 짐작하게 된다.


◆조종사노조가 만든 ‘블랙리스트’


지난 5월16일 대한항공 조종사노조는 서울 서소문 대한항공 사옥 입구에서 ‘조양호 총수 일가 퇴진 촉구대회’를 진행했다. 이날 현장에 참석한 노조원 30여명은 “갑질경영 퇴진을 위해 투쟁한다”고 소리쳤다. 조종사들이 근무복을 차려 입고 공항이 아닌 서울 한복판으로 나선 이유는 분명하다.

조 회장 일가 갑질 및 비리 경영 비난의 시발점이 된 조현민 대한항공 전 전무의 사건이 발생한 지 한달여가 지났지만 사법당국은 압수수색, 소환 조사를 진행한 것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연일 쏟아지던 조 회장 일가의 갑질, 비리 의혹도 점차 잦아드는 상황에서 가만히 앉아 있으면 다른 사건들처럼 유야무야 묻힐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규남 대한항공 조종사노조 전 위원장은 “조양호 일가가 배임·횡령으로 얻은 부의 축적은 건드리지 않고 부분적인 탈법 행위만 처벌한다면 (총수 일가가) 잠시 물러서 있다 복귀하는 일이 되풀이될 수 있다”며 “사법당국에서 끝까지 책임을 따질 의지가 있는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조종사노조는 조 회장 일가의 측근을 특정한 일종의 ‘블랙리스트’를 만들었다. 조 회장의 사퇴는 물론이고 수족으로 알려진 주요 임원들까지 모두 경영일선에서 물러나야 부도덕한 갑질경영이 사라질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총수 일가의 갑질경영을 중단시키기 위해서는 뿌리깊은 측근 경영이 사라져야 한다고 본 것. 김성기 조종사노조위원장은 “재벌오너 갑질의 폐해가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되짚어 볼 것”이라며 “재발 방지를 위한 근본적인 수술을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번에 언급된 블랙리스트에는 한진그룹 계열사의 주요 인사들, 조 회장의 최측근이 들어 있다. 조종사노조는 총수 일가의 갑질 및 비리를 근절하기 위해서는 조 회장 측근들도 반드시 떠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조종사노조가 조 회장과 함께 물러나야 한다고 특정한 인물은 석태수 대한항공 부회장을 비롯해 서용원 한진사장, 강영식 한국공항 사장, 우기홍 대한항공 부사장, 이수근 대한항공 기술부문 부사장 등 5명이다. 특히 석태수, 서용원, 강영식, 우기홍 등 4명은 한진그룹의 ‘서울대 출신 4인방’으로 경영일선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핵심 인물이다.

석태수 부회장은 대한항공 경영기획팀장과 경영기획실장 및 미주지역 본부장 등을 역임했으며 역사 속으로 사라진 한진해운의 대표와 법정관리인을 맡아 조 회장을 보필한 바 있다. 최근 갑질 논란이 일자 대한항공 부회장으로 발탁될 정도로 조 회장의 신망이 두터운 측근이다.

서용원 한진 사장은 대한항공 교육계획총괄부를 시작으로 노사협력실장, 그룹경영지원실장, 부사장 등을 역임하고 2014년 한진 대표이사에 올라선 뒤 조 회장을 보필하고 있다. 그는 조 회장이 평창동계올림픽 추진단장으로 발탁되자 유치 관련 업무를 총괄한 심복이다.

강영식 한국공항 사장은 1972년 대한항공에 입사해 기술 부문 총괄이사장까지 맡았으며 조 회장보다 2년 앞서 대한항공에 입사한 선배이기도 하다. 지난해 1월에는 대한항공의 자회사인 한국공항 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우기홍 대한항공 부사장은 2010년 대한항공 미주지역 본부장을 역임한 뒤 여객사업본부장, 경영전략본부장 등을 거쳐 지난해부터 부사장직을 맡고 있다. 이수근 대한항공 기술부문 부사장은 1986년부터 대한항공에 재직했으며 현재 정비본부장을 겸하고 있다.

김성기 노조위원장은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일부 경영진을 특정한 것은) 조 회장 측근을 언급한 것”이라며 “조 회장이 2선으로 물러나도 그들이 있다면 똑같은 상황이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사진=뉴시스 김선웅 기자

◆확실한 신뢰 보여야 끝날 투쟁

조종사노조가 블랙리스트를 만든 까닭은 조 회장이 ‘눈 가리고 아웅’식의 보여주기 경영을 되풀이 했기 때문. 조 회장은 조 전 전무의 갑질 논란 이후 뒤늦은 사태 수습에 나섰고, 책임경영을 강조하며 진에어 대표이사직에서도 물러났다.

하지만 석태수 한진칼 대표이사를 대한항공 부회장에 발탁하면서 책임경영을 하겠다던 그의 공언이 무색해졌다. 언뜻 보면 갑질 논란에 책임을 진 오너의 모습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다르다. 경영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측근을 앞세운 것이다.

대한항공의 실상을 잘 모르는 일반인들은 조 회장의 선택을 책임경영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내부 직원들은 고개를 젓는다. 회사 실상을 훤히 아는 직원들은 조 회장의 태도가 급한 불을 끄기 위한 임시방편으로 생각한다는 후문이다. 현재 분위기라면 대한항공 조종사노조와 직원들의 총수 일가 퇴진 촉구는 일정한 결실을 얻기 전까지 계속될 수밖에 없다.

대한항공 조종사 A씨는 “대한항공 직원들의 총수 일가 퇴진 운동은 지금 분위기만 놓고 봤을 때 조 회장 등의 실질적인 퇴진이 결정돼야 끝날 것”이라며 “그렇기 때문에 이번 사태가 얼마나 길어질지는 가늠할 수 없다”고 말했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542호(2018년 5월30일~6월5일)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