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한반도의 평화 기류가 무르익었다. 역사적인 4·27 판문점선언은 오랜 분단과 전쟁의 공포를 끝내고 평화의 시대를 열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줬다. 6·12 북미 정상회담과 비핵화 합의의 성과도 이뤘다. 지난달 18~20일 평양에서 진행한 문재인정부 3차 남북 정상회담은 북미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진 시점에서 비핵화 진전, 남북관계 개선, 군사적 긴장완화와 전쟁위험 종식이라는 3대 의제의 합의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한편으로 대한민국이 처한 현실은 아직도 경제적 불평등과 계층갈등, 이념대립이 적체된 과도기 수준이다. 자본주의는 고도화됐지만 담론은 여전히 개발시대에 머물고 있다. 이때 남북 평화공존을 통한 화해와 협력은 우리 사회의 고질적 갈등을 치유할 마중물이 될 수 있다. 정치상황의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는 지속가능한 남북 경제교류는 어떻게 이뤄져야 할까.
<머니S>는 창간 11주년을 기념해 이장희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68)를 만났다. 그는 “이 기회를 놓친다면 우리는 미래세대에 할 말이 없을 것”이라면서 “반드시 평화적인 통일로 연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1977년 독일 유학시절부터 40년 넘게 동·서독 분단과 통일을 연구하고 거기서 얻은 ‘통독의 교훈’을 남북 현실에 어떻게 적용할지를 끊임없이 탐구한 이론가이자 실천가다.
(왼쪽부터)이인우 편집부국장, 이장희 한국외대 명예교수. /사진=임한별 기자 ◆“판문점선언, 돌이킬 수 없는 강 건넜다”
- 남북 정상회담 이후 대내외적으로 환경이 변했고 변수가 많아졌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유화적인 자세를 스스럼 없이 드러낸 것이 가장 큰 변화다.
▶판문점선언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하나의 대들보를 놓았다. 이전과는 다르다. 1972년 7·4 남북 공동성명, 1992년 남북 기본합의서는 우리 측이 주도하고 북한이 마지못해 응하는 식이었다. 또 비공개작전 식이었다. 이번에는 전세계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정성 있고 절박한 심정으로 만났다. 북한의 평창동계올림픽대회 참가가 성사되면서 자연스럽게 물꼬가 트였다. 미국과 중국 등 주변국가와의 외교문제에서도 이전에는 우리 혼자 설득했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남북 양쪽이 같이 했다.
- 북한도 마치 준비했던 것처럼 회담을 성사시킨 것은 내부적으로도 상당한 변화가 있었던 것 아닌가.
▶북한은 그동안 1인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너무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정치범 수용 등의 인권문제와 핵실험으로 국제사회의 불신을 받았다. 특히 UN의 제재로 철저히 고립된 상태였다. 이미 박근혜정부 때도 우리에게 신호를 보냈지만 우리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촛불정부는 이 문제를 정말 아파했다. 어떻게든 풀고자 했다. 그 연장선에서 북한에 시그널을 보낸 동계올릭픽 초청이 귀한 판문점선언을 만들어냈다. 판문점선언은 한반도에 더 이상 전쟁은 없을 것이며 새로운 평화의 시대가 열렸음을 8000만 우리 겨레와 전세계에 엄숙히 천명했다. 전쟁, 얼마나 아프고 피맺힌 얘긴가. 많은 사람이 울컥했을 거다. 68년 분단으로 독버섯처럼 자라난 수많은 모순과 적폐가 냉전체제를 빙자해 온갖 부정부패를 키우지 않았나.
- 남북통일은 한반도를 둘러싼 각국의 외교·안보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문제다.
▶주변국 사이의 기싸움과 각국 내부의 특수관계가 있을 뿐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대선과정 중 러시아 자금 스캔들로 탄핵위기에 몰렸다. 탈출구가 필요한 상황인데 미국 내 정치역사상 누구도 건드리지 못한 북한과의 교류에 첫발을 뗐다. 1973년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이 핑퐁외교로 중국에 첫발을 들여놓은 것만큼 위대한 성과다. 만일 트럼프가 북미관계를 정상화한다면 정치적 위기를 모면할 뿐더러 노벨평화상도 탈 수 있다. 우리도 도와줘야 한다. 가장 당황하는 것은 일본이다. 일본 보수정부와 극우파는 과거 식민주의가 근대화에 도움을 줬다고 주장해왔다. 또 이 같은 논리는 남북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진영논리를 먹이로 삼았다. 진영논리가 사라지면 역사적 정의와 식민지 배상문제가 대두되고 아베정권의 논리를 더 이상 지탱하기가 힘들어진다.
◆경제교류, 대기업 아닌 중소기업에 기회 줘야
- 바람직한 남북 경제협력 방안은 무엇인가.
▶통일경제 철학에는 3가지 큰 방향이 있어야 한다. 먼저 누가 주도할 것인가의 문제다. 대기업이 아닌 중소기업이 전면에 나서야 한다. 둘째, 미국이 아닌 남북이 주체가 돼야 한다. 마지막으로 균형적 협력이어야 한다. 우리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북측은 차별을 느낀다. 가까운 사례로 탈북민과 특히 여성 대부분이 남한사회의 차별에 고통 받는다. 북한 인민이 굳이 남한으로 넘어오지 않아도 경제적으로 잘 살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줘야 한다. 북한사회의 경제수준을 높여줘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대기업이 가면 자동화 설비로 대량생산체제를 구축해 고용창출의 길을 막게 된다. 대기업은 글로벌시장으로 나가고 북한 진출은 못하도록 정부가 막아야 한다. 중소기업은 국내에서 한계에 부딪힌 상황이다. 이들 중소기업이 보유한 2차기술을 북한에 전수해 노동집약적 산업을 다시 활성화해야 한다. 산업구조 조정정책도 필요하다. 우리와 북한이 각자 특화된 산업을 나눠가져 중복을 피해야 국제적인 경쟁력을 갖고 통일경제의 밑거름을 만들 수 있다. 이를테면 기술집약적 산업은 우리가, 노동집약적 산업은 북한이 담당해야 한다. 북한이 국제사회의 당당하고 책임있는 일원이 되도록 도와줘야 한다.
- 남북 철도 연결사업이 UN 제재로 지연됐다.
▶1950년 한국전쟁을 계기로 군사분계선을 통과하려면 48시간 전 유엔사령부에 통보한 뒤 인가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남북 철도사업을 위한 공동조사를 서두르다 보니 사전통보가 늦어졌고 결국 UN의 인가를 받지 못했다. 그동안은 인도주의적 사안일 경우 이 같은 규정의 예외로 인정하고 융통성 있게 운영했는데 역대 최고 강도의 북한제재가 지속되다 보니 더 엄격하게 적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UN 역사상 없던 일이다. 우리 정부가 보다 강력하게 UN의 융통성 있는 조치를 요구해야 한다.
이장희 한국외대 명예교수. /사진=임한별 기자 ◆젊은 세대 관심 이끌 수 있는 통일교육 필요
- 통일에 대한 국민의식 함양과 사회적 연대는 어떻게 발전해야 하나.
▶통일의 개념을 정치적·영토적으로만 봐서는 안 된다. 당장은 분단체제의 적대관계를 해소하고 자유롭게 왕래하는 것이 넓은 의미의 통일이다. 독일에서 유학할 때 가장 부러웠던 것이 분단국가임에도 교류가 활발하던 모습이다. 크리스마스가 되니 동·서독 사이 선물이 오가고 가족과 친척이 자유롭게 만나는 것은 문제가 안 되더라.
- 남한 내부적으로 남남갈등이 첨예하다.
▶분단의 가장 큰 아픔은 남남갈등이다. 남남갈등은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나이든 세대는 경직된 사고 때문에 이념적 틀을 바꾸기 힘들다. 우리도 색깔론의 피해를 입는 사람들 아닌가. 분단 68년이 만든 진보·보수의 개념은 다른 나라에서 이해 못하는 특수한 문제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고 1998년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를 만들었다. 민화협에는 여야 정당과 양대 노총, 여성단체 등 사회 각계각층의 이질적인 집단을 끌어들였다. 누구든 모여 대화하자는 목적으로 남남대화를 제도화했다. 남남갈등을 어떻게 풀 수 있냐고 묻는다면 나는 접촉하고 소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람은 아무리 적이라도 일단 만나면 ‘내가 조금은 오해한 부분이 있구나’, ‘(상대방도) 그렇게 나쁘진 않구나’라는 생각을 갖는다. 1998년 (금강산 관광을 위한) 금강호를 탈 때 나를 고발했던 사람도 동행했다. 바다로 떠밀어버리고 싶던 사람도 다녀오고 나니 친해졌다. 남녀가 연애하는 것과 같다. 직접 만나면 오해도 선입견도 풀 수 있다.
- 민족 동질성과 통일의 당위성에 대한 교육이 부족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통일교육이다. 통일을 완성할 미래세대가 희망이다. 제일 무서운 건 무관심이다. 뉴스에서 보여주는 북한의 어두운 모습들로 인해 젊은 세대는 ‘우리가 왜 같이 살아야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런 잘못된 생각을 없애려면 끊임없는 배움의 과정이 필요하다. 나도 평양을 10번 이상 다녀왔다. 민중이 원하면 정치인도 표를 얻으려고 바뀌지 않겠나. 박근혜정부의 국정농단에도 대한민국이 건재한 것은 그동안 쌓은 민주시민사회의 역량 덕분이다. 국제사회에 나가면 ‘코리아’를 대단하고 역동적인 나라로 본다. 일본이 가장 부러워하는 부분이다. 이런 역동성을 가진 젊은 세대가 통일에 대해 전향적인 생각을 갖도록 끊임없이 교육하고 포용해야 한다.
◆판문점선언 국회 비준동의 반드시 필요
- 통일을 위해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판문점선언이 UN과 국제사회의 지지를 받으려면 국회 비준동의를 받아 구속력 있는 문서로 만들어야 한다. 대통령이 바뀌어도 다음 정권이 마음대로 바꾸지 못하게 해야 한다. 야권은 대승적 차원에서 하루빨리 판문점선언의 비준동의를 마무리해주길 바란다. 또 정부는 통일관련 단체에 예산을 지원할 때 일반 시민단체처럼 깐깐하게 회계자료를 요구하지 않았으면 한다. 통일단체는 대가를 바라지 않고 역사적 과업에 종사하려고 모인 사람들이다. 회계관리 능력이 떨어진다. 그렇다고 담당자를 고용한다면 인건비가 지원금보다 많게 된다. 회계보고를 단순화하는 것만으로 통일운동을 지속하는 데 큰 힘이 될 것이다.
- 독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평화통일은 우리와 북한 둘 다 원하고 있다. 평화체제를 제도화하고 경제적 간극을 메워주는 것이 곧 남북공생의 길이다. 인권문제, 핵문제를 북한의 모든 것으로 보지 말고 먼저 이해하려고 노력해보자. 왜 그럴 수밖에 없었나. 시대가 그들을 이렇게 만들었다. 그리고 지난해 9월1일 시작한 강명구 마라토너의 ‘유라시아 평화마라톤’이 1주년을 넘었다. 네덜란드 헤이그를 출발해 1만3000㎞를 달려 지금 중국 베이징에 도착했다. 앞으로 두만강을 건너 북한으로 들어가는 관문에 도착한다. 정치색 없는 순수한 민족화해운동이자 평화통일운동의 외연을 확대하는 퍼포먼스다. 국민적 성원이 큰 힘이 될 것이다.
☞프로필
▲1950년 경북 경주 출생 ▲고려대 법학학사 ▲서울대 법학석사 ▲독일 킬크리스티안알브레히트대학원 ▲평화통일정책 자문회의 자문위원 ▲세계국제법협회 한국본부 이사 ▲대한국제법학회 회장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정치외교분과위원장 ▲평화통일시민연대 상임대표 ▲남북경협 국민운동본부 상임대표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 ▲아시아사회과학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