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참전 미군 전사 실종 장병 유가족이 현충탑을 참배했다. /사진=뉴시스 이영환 기자
6·25참전 미군 전사 실종 장병 유가족이 현충탑을 참배했다. /사진=뉴시스 이영환 기자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다. 아무리 좋은 추억이라도,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은 고통이라도 날이 가면 갈수록 잊는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까지 있다. 지금 닥친 일에 몰두하다 보면 모든 것은 빠르게 흘러가고 생각하지도 못했던 앞날이 다가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움직이라고 재촉한다.

 
사람이 잊어야 살 수 있다고는 하지만 절대 잊어서는 안 될 것도 많다. 비록 살맛을 빼앗아가는 고통은 잊을지라도 그 쓰라린 아픔을 가져온 일 자체, 즉 역사는 잊어서는 안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촌철살인을 떠올리기 전에 역사를 잊지 않는 건 우리의 의무이자 권리다.

◆정전협정 66주년 '머나먼 통일'


6·25전쟁도 그 아픔은 잊을지라도 그 전쟁 자체는 잊어서는 안 될 살아있는 역사다. 1953년 7월27일 오전 10시. 3년1개월 동안 한반도를 고통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포성이 멈췄다.


6·25전쟁은 군인 270여만명(국군과 유엔군 77만여명, 북한군과 중공군 200만여명)과 민간인 250여만명(남한 100만여명, 북한 150만여명)의 목숨을 빼앗아갔다. 그 죽음의 영향으로 전쟁 미망인 30여만명과 전쟁고아 10여만명은 한순간 삶의 기둥을 잃었다.


1000만명가량이 가족과 찢어지는 생이별을 했고 재산피해도 320억달러에 달했다. 1950년 6월24일. 태풍 엘시의 기세가 꺾이고 단비가 내리자 국군은 전군에 내렸던 비상경계령을 해제하고 장병들을 휴가 보내 모내기를 돕도록 했다. 그날 밤 육군본부 장교클럽에서는 국군지휘부가 미국 군사고문단과 밤늦게까지 파티를 열었다. 김일성은 바로 그 틈을 노렸다.


다음날 25일, 일요일 새벽 4시. 38선 일대에 전진 배치된 북한군에게 전화와 무전으로 ‘폭풍’이란 암호와 ‘224’란 숫자가 하달됐다. 대대적인 남침공격 명령이었다. 준비된 자와 넋 놓고 당하는 사람의 결과는 뻔했다. 정예병 20만명과 탱크 200대를 앞세운 북한군은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10만명도 안 되고 탱크도 없으며 상당수가 휴가 간 국군을 파죽지세로 밀어붙였다. 수도 서울이 3일 만에 떨어졌고 40일 뒤인 8월4일엔 최후의 방어선인 낙동강전선으로까지 쫓겼다.

미군과 유엔(UN)군의 참전과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는 뒤집어졌다. 국군 6사단 7연대 1대대 장병들은 10월26일 오후 2시15분 압록강 국경선에 태극기를 꽂고 수통에 압록강 물을 가득 채웠다. 곧 이룰 것이란 통일의 희망은 대규모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걸려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1951년 1월4일 서울을 다시 뺏기고 평택까지 밀려났을 때 유엔군은 한반도에서 철수까지 검토하는 위기가 찾아왔다.


하지만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 워커 미8군사령관이 교통사고로 순직하고 그 자리를 이어받은 리지웨이 장군은 ‘울프하운드작전’ ‘선더볼트작전’ ‘라운드업작전’ 등을 통해 반격의 토대를 만들고 북한·중공연합군을 38선 이북으로 몰아냈다. 그러고는 2년이 넘는 지루한 휴전회담이 이어졌다.

◆'노예공화국'서 탈출 못한 한원채


미국과 유럽, 중국과 소련 및 북한의 군사·정치적 고려로 포성은 멈췄다. 하지만 기대한 평화는 더디 왔다. ‘1·21청와대 습격사건’ ‘8·18도끼만행사건’ ‘아웅산폭발사건’ ‘금강산 관광객 박왕자씨 피살사건’…. 잊을 만하면 가슴 쿵 내려앉을 사건이 일어났고 그때마다 아물려던 상처는 덧나 그 아픔이 66년이 지난 지금까지 잊히지 않고 계속 이어지고 있다.


한원채-한봉희 부녀의 사별로 이어진 생이별의 고통은 빙산의 일각이라고 할 수 있다. 고 한원채씨는 함흥화학공업대학을 졸업하고 길주팔프연합기업소에서 1급 설계원이자 정치보위부 비밀공작원으로도 활동했다. 그의 아내는 의사였고 두 딸은 대학에 다니고 아들은 고등학생이었다.


전형적 중산층으로서 잘살던 그는 죽어라 일을 해도 부가 없는 세상, 부를 창조한 사람이 그 부를 소유하지 못하는 사회, 사회악의 쓰레기통에서 악취를 맡으며 사느니 탈출하기 위해 정든 고향 땅과 집, 손때 묻은 가장집물을 그대로 남겨두고 두만강을 넘었다.

하지만 운명의 여신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중국 공안에 잡혀 북송돼 수용소에 갇혔다가 천신만고 끝에 탈출했지만 또 잡혀 북송됐고 구사일생으로 또 탈출했다. 이때 그는 탈출과정과 석달 동안 수용소에서 겪은 일을 수기로 남겼다. 가까스로 한국으로 오는 길을 뚫었지만 막판에 다롄(大連)에서 체포돼 다시 북송된 뒤 고문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롄에서 아버지와 생이별한 차녀 한봉희씨는 2001년 8월 한국에 왔다. 한씨는 19년 동안 간직해온 아버지의 수고를 지난 6월 <노예공화국 북조선 탈출>이란 제목으로 출판했다.


◆백두산 호랑이, 백두대간서 놀게 하라


<노예공화국 북조선 탈출>은 우리를 아프게 한다. ‘인민의 낙원’에서 ‘이밥에 쇠고기 국’을 먹여주지는 못하더라도 더 이상 살 수 없다며 목숨 걸고 압록강, 두만강을 건넌 사람들을 붙잡아가 ‘반역자’로 처단하고 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몸으로 부딪쳐보지 않은 사람은 잘 믿으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현장을 직접 겪은 사람들은 한 대목 한 대목마다 눈물을 쏟고 몸서리를 친다.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를 몸서리치게 했던 그 포성은 멈췄지만 그 피눈물 범벅이 된 몸서리는 여전히 되풀이되고 있다.

 
포성이 멎고 강산이 일곱 번 바뀌고 있다. 악독한 일제 지배는 35년이었지만 분단과 전쟁, 생이별과 인권탄압은 고희를 바라보고 있다.


철조망에 가로막혀 오가지 못하는 백두산 호랑이가 ‘노예공화국’에서, 백두대간에서 힘차게 포효하고 뛰어놀아야 한다. 살기 위해 그 고통을 잊는다 해도 절대로 그 역사는 잊어서는 안된다. 분단과 전쟁과 생이별과 인권탄압의 고통을 대물림해서야 되겠는가. 영화 <친구>의 명대사가 떠오른다. “많이 아팠다 아이가….”   

☞ 본 기사는 <머니S> 제603호(2019년 7월30일~8월5일)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