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구 내곡동 헌인마을은 1963년 자활을 위해 상경한 한센인의 동네였다. 지금은 원주민 대부분이 떠나 10여가구만 거주한다. 1980~1990년대 외지 상인의 유입과 한센인 근로자의 노력으로 ‘헌인가구단지’가 성공하며 명성을 떨쳤다. 정부는 2003년 헌인마을의 그린벨트를 해제했다. 이후 도시개발구역으로 지정된 헌인마을은 ‘강남 최고급 주거타운’이라는 장밋빛 청사진이 그려졌지만 개발 과정에 온갖 비리가 드러나 사업을 지속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박근혜정부 비선실세 최순실(최서원으로 개명)의 집사로 알려진 ‘데이비드윤’도 헌인마을의 뉴스테이 개발 비리에 연루돼 관련자가 구속됐다. 여러 이해관계가 얽힌 헌인마을은 갖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올해 모든 채무를 청산했다. 새 사업이 본격적으로 재개해 2021년 초 착공을 준비 중이다. <편집자주>


[글 싣는 순서]

‘뉴스테이 비리’ 오명 벗고 새 청사진(상)
국정원 인근 강남 땅, 최고급 테라스하우스타운 세운다


비선실세 연루, 개발업자 H씨 공방의 진실(하)
청탁 오간 수십억원의 행방과 보상금 수백억원?


‘10년간 새추위 돈 빨아먹고 산 OOO!’
‘빨리 47억 갚고 마을을 떠나라!’


헌인마을 입구로 들어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여기저기 내걸린 검은 현수막과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글이다. 마을 밖 곳곳은 이미 아파트 개발이 진행되고 서울 강남과 경기도 판교 등을 잇는 용인-서울고속도로가 바로 옆에 지나가지만 현실세계와는 동떨어진 듯 고립된 ‘헌인마을 도시개발구역’. 13년 전 개발의 꿈에 부풀었던 주민들은 지난 세월 지칠 대로 지쳐 불안한 기색인 한편 다시 꿈틀대는 사업 정상화의 기대감에 들뜬 모습도 보였다.


헌인마을 입구에 걸린 조합 현수막. /사진=김노향 기자
헌인마을 입구에 걸린 조합 현수막. /사진=김노향 기자

◆신원-H씨 사업권 다툼

헌인새마을추진위원회(새추위)는 헌인마을에 최초로 정착한 1세대 한센인과 그들의 후손이다. 이 중에는 한센인이 낳은 친자도 있고 정부가 비윤리적으로 자행한 한센인의 인공 불임수술에 의해 양자로 들여진 자녀세대 또한 적지 않다.

새추위는 사실상 헌인마을 도시개발사업을 주도하는 조합으로 볼 수 있다. 2009년 조합이 결성돼 현재 조합원 수가 215명이지만 실제 헌인마을에 거주하는 주민은 10여가구뿐이다. 조합은 헌인마을사업와 관련한 공동재산의 관리와 모든 의사결정권을 가졌다.


문제는 사업주체를 놓고 주민들은 둘로 양분된 상태다. 한쪽은 새로 사업권을 가진 신원종합개발 컨소시엄을 지지하고 다른 한쪽은 이미 파산한 건설업자 H씨에게 사업권이 있다고 주장한다.


마을 안 낡은 폐건물과 그 뒤로 보이는 국정원. /사진=김노향 기자
마을 안 낡은 폐건물과 그 뒤로 보이는 국정원. /사진=김노향 기자

◆H씨는 누구?

H씨는 1996년 세종종합건설이란 영남지방의 작은 건설사를 경영했다. 주로 지방의 아파트 개발을 시행했고 2006년에는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서 개발사업을 수행할 정도로 나름 성공한 건설업자였다. 2006년 H씨는 헌인마을사업을 위해 46억원을 들여 주민들의 땅 지분을 취득했다.

헌인마을의 존재가 세간에 알려진 것은 박근혜정부 때다. 박근혜정부 비선실세로 현재 구속 중인 최순실(최서원으로 개명)의 집사 데이비드윤은 헌인마을의 뉴스테이(민간 임대주택) 사업지구 지정을 청탁받고 그 대가로 수수료 3억원을 건네받았다. 데이비드윤은 최순실에게 뉴스테이 지구 지정을 청탁하고 최순실이 다시 대통령에게 헌인마을을 언급해 뉴스테이사업이 추진됐지만 결국 좌초했다.

이때 데이비드윤에게 청탁금을 건넨 것으로 의혹을 받는 건설업자가 H씨다. 조합 측은 H씨가 조합에서 사업비 명목으로 50억원을 빌려썼다고 주장한다. 조합 관계자는 “50억원 중 착수금으로 오간 돈이 3억원뿐이고 나머지 47억원의 행방은 묘연하다”고 말했다. 데이비드윤은 한국 정부에 의해 국내 송환을 위한 네덜란드 현지 재판을 받고 있다.

H씨는 2011년 6월까지 헌인마을사업 시행대행사인 우리강남PFV의 대표를 맡았다. 각종 인·허가 문제와 글로벌 금융위기, 채무불이행으로 H씨는 헌인마을사업을 위해 손잡았던 시공사들과 함께 몰락했고 수백억원의 세금까지 떠안았다. 2015년 서울시가 공개한 고액·상습 체납자 명단을 보면 그가 체납한 지방소득세는 15억6000만원으로 확인됐다. 당시 H씨 개인이 체납한 법인세 등 국세청이 과세한 세금도 300억원을 넘었다. 하지만 H씨는 파산한 후에도 헌인마을사업을 포기하지 않고 사업권을 주장했다.

H씨는 사업 초기 개발에 반대한 주민을 몰아내기 위해 강제철거도 진행했다는 게 주민들의 설명이다. 2008년에는 헌인마을 내 4개의 가구점에서 한꺼번에 불이 나 경찰이 수사를 진행했다. 당시 경찰은 폐쇄회로(CC)TV를 통해 방화 사실을 확인했으나 특정인과의 연관성은 찾지 못했다고 밝혔다. 조합 관계자는 “용역직원들이 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하고 포클레인 앞에 드러눕고 헌인마을에서는 믿을 수 없는 일들이 벌어졌다”고 토로했다.

◆H씨 “최순실 존재도 몰라”

조합 안팎에선 H씨가 사업을 포기하는 대가로 수백억원에 달하는 보상금이나 사업지분을 요구했다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H씨는 지난달 25일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여러 의혹에 대해 부인하며 억울함을 주장했다. 그는 “올 2~4월 서울아산병원에 패혈증으로 입원한 동안 (본인이) 고용한 고문변호사가 위임장을 꾸며 신원 컨소시엄에 사업권을 넘겼다”고 주장했다.

이어 “친할머니가 한센인이어서 오로지 주민들의 복지 향상에만 관심을 갖고 개발을 시작했을 뿐 보상금을 요구했다는 것은 거짓말”이라며 “사업권만 다시 돌려받는 것이 목적”이라고 덧붙였다. 데이비드윤과 관련해선 “TV나 뉴스를 안보고 살아서 최순실이란 인물이 존재하는지도 몰랐다”고 부인했다.

주민들 상처 치유가 우선

헌인마을 사업 초기 땅을 팔고 개발에 동의한 주민과 반대하는 주민이 분열돼 모두가 어려움을 겪었다는 게 지역민들의 푸념이다. 한 주민은 “지금 마을에 남은 사람들은 온갖 일을 겪고 나서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개발을 기다린다”고 말했다.

헌인마을 개발의 실패는 주민들에게 갖은 상처를 남겼다. 또다른 주민은 “서초경찰서가 헌인마을을 우범지역으로 지정해 단속과 순찰을 지속하지만 쓰러져가는 건물과 방치된 차량, 쓰레기, 유기견 등은 마을을 병들게 하고 있다”며 “하루 속히 사업이 재개되는 것이 더 많은 피해자를 막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617호(2019년 11월5~11일)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