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의외로 간단할 수 있다. /디자인=김영찬 기자
1994년 10월23일 새벽, 서해에서 표류하던 조그만 나뭇배 한척이 수산청 어업지도선에 발견됐다. 그 목선 안에는 놀랍게도 조창호 소위가 타고 있었다. 조 소위는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5월 강원도 인제 한석산 전투에서 중공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13년 동안 덕천 함흥 아오지 강계 등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강제노역소에서 나온 뒤에도 자강도 자성군에 있는 탄광에 배치돼 하루 10시간의 중노동을 강요당했다. 

규폐증에 걸린 조 소위는 목숨을 걸고 북한을 탈출했다. 그는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가서 현충탑 지하 영현봉안실에 있는 자신의 위패를 지웠다. 1977년 전사자로 처리돼 만들어진 위패였다. 그는 중위로 진급한 다음날 육군사관학교에서 전역했다. 44년3개월이라는 가장 긴 군 생활을 마감했다. 조 중위는 6.25 때 생포된 국군포로가 아직도 북한에 많이 살아 있으며 비인간적 대우를 받고 있음을 폭로했다. 

6·25고통 일깨운 조창호 소위

김일성의 ‘폭풍224’라는 암호명에 따라 1950년 6월25일 일요일 새벽4시 38선 전역에서 자행된 불법 남침의 피해는 엄청났다.

3년 동안 죽은 사람만 200만명 이상으로 추정되며, 아직도 정확한 통계는 나오지 않았다. 그보다 많은 사람이 부상당했으며 이산가족도 부지기수였다. 전국의 문화재가 폭격과 화재로 사라졌다. 폭탄비를 맞은 평양과 서울의 피해는 특히 심했다. 해방 후 5년 동안 조금이나마 마련됐던 경제기반은 거의 무너졌다.

전쟁이 끝난 뒤 김일성은 패전의 책임을 물어 반대파들을 숙청해 1인 독재 세습체제를 확립했다. 이승만도 반공을 내세워 독재체제를 강화했다. 민간인들에 의한 민간인 학살과 그에 대한 보복 학살로 같은 민족이라는 동족의식이 옅어졌다.
한국이 고통을 겪는 동안 일본은 훨훨 날았다.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패전국으로서 미군정 아래에 있던 일본은 6·25전쟁을 위한 전방공급기지로 탈바꿈했다. 1951년 전쟁 붐을 만끽한 일본은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회담을 통해 태평양전쟁에 대한 보상금을 한 푼도 물지 않게 됐다. 미국은 전쟁 중인 한국을 강화회담에 오지도 못하게 한 상태에서 일본 입맛에 맞게 주장할 여지를 남기며 독도를 어정쩡하게 처리했다. 일본은 진무경기(56~57년) 이와토경기(59~61년) 이자나기경기(64~70년)이라는 호황을 누리며 승승장구했다.

미국이 소련과 중공의 태평양 진출을 억제하기 위해 패전국인 일본을 전초기지로 삼은 판단이 아직까지 한국에게 고통으로 작용한다. 일제의 한국인 징용에 대한 한국대법원의 배상 판결, 일본의 한국 화이트리스트 제외 및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종료 등으로 이어지는 한일 갈등의 뿌리는 6·25전쟁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아직도 손길 기다리는 박재권 남궁선 이등중사

2018년 10월25일 화살머리고지에서 박재권 이등중사의 유해가 발굴됐다. 박 중사는 휴전이 채 한 달도 남지 않았던 1953년 6월29~30일과 7월6~11일 두 차례에 걸쳐 벌어졌던 화살머리 고지전투에서 전사했다. 국군 2사단은 180명이 전사하고 16명이 실종되면서도 중공군 1300여명을 사살하면서 고지를 지켜냈다. 바로 옆의 백마고지전투에서도 승리함으로써 서울보다 넓은 면적의 철원평야를 확보할 수 있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죽은 사람들은 유해도 찾지 못한 채 잊혔다. 갑작스럽게 휴전이 되고, 비무장지대(DMZ)로 지정되면서 싸우다 죽은 전우의 시신을 그대로 놓고 철수해야 했다. 2018년 9월18~20일 평양남북정상회담 합의에 따라 이뤄진 DMZ 내 공동유해발굴까지 65년을 기다려야 했다.

7개월 뒤인 2019년 5월30일에는 비슷한 장소에서 남궁선 이등중사의 유해도 완전한 형태로 발굴됐다. 늦었지만 후손들의 품에 돌아올 수 있어 다행이다. 6·25전쟁 동안 전사한 16만여명 가운데 2만9000여명만 국립묘지에 안장됐고, 13만여명의 유해는 아직도 수습되지 못하고 있다. DMZ 안에서는 아직도 수습의 손길을 기다리는 박재권 남궁선 이등중사들이 수없이 남아있다.

‘6·15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된 지 20년이 지났다. 이제는 모두 고인이 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남북정상으로는 사상 처음 평양에서 만나 남북화해와 평화통일을 앞당기기 위해 서명한 합의문이다. 5개항으로 된 선언문은 ▲통일문제의 자주적 해결 ▲연합과 낮은 단계의 연방 통일 지향 ▲이산가족 방문단 교환 및 비전향 장기수 문제 해결 ▲경제협력과 사회 문화 체육 보건 환경 등에서의 협력과 교류 활성화 ▲위의 합의를 실천하기 위한 당국 대화 개최 등을 담고 있다.

이 선언문에 쓰인 그대로 남북이 협력하고 노력했다면 통일은 지금쯤 이뤄졌을지 모른다. 하지만 합의는 이행되지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도 북한에 가서 정상회담을 하고 합의문을 갖고 돌아왔지만 결과는 비슷했다. 변하지 않는 북한에 대한 남한의 짝사랑만 이어지다 보니 북한의 변덕에 따라 합의문은 휴지조각이 되기 일쑤였다. 

6.15공동선언 20주년이 뜻깊으려면

역사적인 6·15공동선언 20주년 행사도 한국만의 단독 행사로 치러졌다. 북한이 남한의 일부 단체들이 보내는 전단을 문제 삼아 실낱같은 통로를 막은 탓이다. 통일로 가는 길은 아직도 험하고 험한 고행길일 뿐이다.

북한은 120만명에 이르는 상비군을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수십 년 동안 이어진 경제침체와 출산율 저하에 따른 인구감소로 여성들에게 7년 동안의 국방 의무를 부여했다고 전해진다. 한국도 수많은 젊은이가 학업을 잠시 중단하고 삼복더위와 엄동설한을 군대에서 견디고 있다. 누구를 위해 이처럼 겪지 않아도 될 고통을 우리 아들 딸들이 짊어져야 한단 말인가.

정치의 기본은 민생(民生)이다. 백성이 자기가 할 일을 갖고 먹고 자고 입는 의식주행(衣食住行)을 해결하는 게 급선무다. 남북한은 지금 코로나19의 확산 방지에 골몰하고 있다. 전 세계 무역이 위축되고 교통이 거의 끊겨 경제적 어려움도 심각하다. 한국은 긴급재난지원금을 지급하는 등 총력전을 벌이고 있으나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를 기록할 것이란 전망이 많다. 정확한 정보가 없어 실상을 알기 어렵지만 북한 사정은 더욱 나쁠 것이 확실하다.

남북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의외로 간단할 수 있다. 6·15공동선언문에서 밝힌 대로 경제협력과 교류활성화의 물꼬를 트는 것이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운 사회를 향해 나아가는 멈출 수 없는 걸음이다. 후손들에게 ‘당신은 그때 무엇을 했느냐?’고 손가락질 받지 않고 떳떳할 수 있는 길이다. 역사는 그런 어려움을 딛고 올바른 길로 나아갈 때 만들어진다. 일부 기득권들의 거센 반발은 국민과 역사의 이름으로 단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