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11시쯤 종로5가 A시장 안 노점.2020.08.11© 뉴스1김근욱 기자

(서울=뉴스1) 이승환 기자,원태성 기자,김유승 기자,김근욱 기자 = 둑은 가장 허약한 곳부터 균열이 생기며 터져 버린다. 최대 500㎜ '폭우’가 쏟아지면서 취약계층 터전은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고시원과 쪽방촌 거주자, 노숙인과 노점 상인의 일상에는 금이 가 위태로움이 밀려들고 있었다. 11일 중부지방 중심으로 49일째 폭우가 이어지면서 하루 뒤면 역대 최장기간 장마 기록을 갈아치우게 된다.


◇"손님 3분의1로 줄어…하루 10만원도 못 벌어"

종로5가 A시장 노점상인 정승만씨(가명·61)는 분홍색 앞치마를 둘렀다. 비가 주춤하던 이날 오전 11시였다.


정씨는 요즘 하루에 10만원도 못 번다고 했다. 한창 때는 하루 80만원까지 벌었다. 손님이 50명 이상 몰려들었다. 정씨는 "이제는 하루에 15명 안팎으로 온다"며 "손님이 3분의1로 줄었다"고 말했다.

올해 초 시작돼 장기화하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최장기간 장마까지 겹치면서 노점상인들은 비명 같은 한숨을 쉬고 있다.


비가 쏟아지면 사람들은 노점이 아닌 실내로 향한다. 정씨에게 '오늘 손님은 몇 명이나 왔느냐'고 묻자 "질문한 선생님 단 1명"이라고 답했다. 마약 김밥과 빈대 떡, 오뎅 등 분식 이름이 메뉴판에 빼곡히 적혔으나 당시 이곳에는 정씨와 기자 단 2명뿐이었다.

◇월세 25만원 고시원…십자 모양 누런색 테이프


이날 오전 10시30분쯤 용산구 숙대입구역 인근 B고시원. 3층짜리 건물 외벽 곳곳이 벗겨졌고 빗물 자국이 선명했다. 64개 방이 빈틈없이 건물 2~3층에 들어섰다.

방 벽면에는 십자 모양으로 누런색 테이프가 붙어 균열을 막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회색 브라운관 TV가 놓였다. 베개와 이불 없이 침대만 방구석에 배치됐다. 방마다 에어컨은 없었고 선풍기도 잘 보이지 않았다.

오전 11시쯤 용산구 숙명여대역 인근 A고시원 방.© 뉴스1원태성 기자

이곳 거주자 60여명 가운데 20명은 기초생활 수급자다. 20명은 노숙 생활을 하던 이들이다. 나머지 약 20명은 일용직 노동자다. 가장 저렴한 방 월세는 25만원이고 크기는 9.9㎡(약 3평)이다.

'일반' 사람들은 에어컨과 선풍기를 튼다. 장마에도 기승을 부리는 무더위를 몰아내기 위해서다. B고시원에서는 하루 2차례 난방기를 작동시켜 습기를 밀어내고 있다. 힘겨운 싸움이다. 고시원 내부에 발을 딛자마자 눅눅함이 훅 느껴졌다.

고시원 총무 박모씨(61)는 "최근 2주간 큰비가 들이닥치면서 옥상에 누수가 계속 발생한다"며 "하루에도 몇 번씩 경보음이 울린다"고 말했다.

경보음이 울린다고 해도 이곳 사람들은 놀라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B고시원 입주자 이명호씨(가명·52)는 "그냥 답답한 정도"라고 했다.

신경정신과 진료가 필요하다는 이씨는 40년 가까이 서울역에서 노숙 생활을 했다. 그때와 비교하면 "이곳 생활은 답답한 정도"라는 말처럼 들렸다. 해맑게 웃던 그는 가족 얘기가 나오자 굳은 표정을 짓고 돌아 앉았다.

일용직 노동자 설민수씨(가명·49)는 "끼니 해결이 귀찮아 1년 전 B고시원에 들어왔다"고 말했다.

그는 속옷차림으로 브라운관 티브이를 보고 있었다. 선풍기도, 에어컨도 없었다. 설씨는 '장마가 이어지는데 불편한 것 없느냐'는 질문에 "내가 살면 얼마다 더 살겠느냐"고 되물었다. "가끔 자식이 보고 싶다"는 그는 그러나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

◇쪽방촌 사람들 "비 오면 방 끓는다"

주거 취약 계층은 재해 위험에 더욱 노출될 수밖에 없다. 열악한 시설과 환경을 이유로 '재해가 아닌 인재'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서울역 노숙인 김철수씨(가명·57)는 "몸도 안 좋고 이도 다 빠졌는데 비까지 오면 감정도 너무 우울해진다"고 했다. 끼니 때가 되면 김씨는 우울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비를 맞으며 쉼터로 가야한다. 그는 "밥을 무조건 먹기 위해 비를 뚫고 쉼터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종로구 돈의동 한 쪽방촌 건물은 직사각형 형태다. 3~4개 쪽방이 다닥다닥 건물 1층에 들어섰다.

회색 콘크리트 바닥으로 된 복도를 지나는 동안 스산함이 느껴졌다. 누런색 천장 절반은 빗물로 변색된 상태였다.

쪽방 문 사이로 손바닥만 한 선풍기가 회전하고 있는 게 보였다. 활짝 웃는 손녀딸 사진이 냉장고에 붙어 있었다. 성인 한 명이 다리를 모두 뻗고 눕지 못할 정도로 비좁은 방이었다.

오후 4시종로구 돈의동 쪽방촌 건물 복도.2020.08.06.© 뉴스1김근욱 기자

이곳에서는 쏟아지는 폭우도, 모처럼 떠오른 태양도 보기 어렵다. 창문이 없어 바깥을 구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쪽방촌 사람들은 바닥 온기를 느끼며 장마를 감지한다.

건물 밖에 나와 있던 박진수씨(가명·50대)는 "비가 쏟아지면 바닥이 끓는다"며 "숨이 막혀 밖으로 나온다"고 말했다.

남들은 폭우 때문에 외출을 꺼리지만 이곳 사람들은 문밖으로 탈출해야 했다. 검은색 민소매 차림의 박호상씨(가명·70대)는 "방 한 번 보라"며 자신의 쪽방을 가리킨 뒤 "여기 사람들은 너무 더워서 새벽에 다 밖을 돌아다닌다"고 말했다. 쪽방 문들은 모두 열려 있었다.

<저작권자 © 뉴스1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