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연환 사범(사진 맨 오른쪽)은 지난해(2023년) 말 미국 도장 개원 50주년을 맞아 제자들과 함께 기념식을 열었다.
박연환 사범(사진 맨 오른쪽)은 지난해(2023년) 말 미국 도장 개원 50주년을 맞아 제자들과 함께 기념식을 열었다.



지금의 삼성과 LG가 없던 시절, 한국은 사람을 수출했다. 나라에 기술과 자본이 없었으니 몸으로 때워 외화를 벌고 본국에 보낸 이들이 적지 않다. 60년대 파독 광부와 간호사가 그랬고 70년대부터는 체격을 갖춘 태권도 사범들이 국위선양을 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국기'(國技)와 '극기'(克己)만 가지고 타국의 문을 두드렸다.


박연환(72)은 1978년 박정희 정부가 공식적으로 파견한 태권도인이다. 고려대 재학 시절 선수권대회를 휩쓴 전력에 청와대 경호실에서도 합격 통지를 받았지만 동시에 부름을 얻은 정부 태권도 사범 해외파견 프로젝트에 응했다. 대상지는 아무도 가지 않으려 꺼리던 아프리카 남부 입헌군주국 레소토(Lesotho)였다.

레소토는 당시 정부가 유엔 가입을 위해 북한과 교류경쟁을 벌이던 주요국이다. 당시 경제력이 한국에 밀리지 않던 북한이 물량공세를 하던 상황이어서 정부는 특수부대를 가르칠 무관사범 한 명과 의사 두 명, 모터싸이클 오십대를 레소토에 파격 지원키로 했다. 비슷한 맥락에서 우간다에도 두 명을 파견하려고 당시 안기부가 후보군을 훈련 시켰지만 독재자 이디 아민이 쫓겨나는 변수가 발생하면서 레소토 계획만 실행됐다.


아프리카 남부에서의 2년은 뜨거운 시간이었다. 태권도를 배우려던 특수부대원들과 민간인들에게 무도정신을 먼저 가르쳤지만 초반엔 완력을 시험해 보려던 이들이 더 많았다. 몸집 큰 이들이 무턱대고 덤비는 경우가 많아 항상 긴장 상태였다. 젊은 혈기가 아니었다면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제자들이 늘면서 마음의 문도 열리기 시작했다. 박 사범은 무도는 정석으로 가르치면서도 당시 1200달러로 적지 않던 월급을 모두 쓰면서 한국인의 정(情)을 표현했다. 아이들에게 도복을 사주고 제자들에게 교본을 나눠주다보면 어느새 통장은 비었지만 마음은 꽉차 있었다.


그렇게 1년 만에 자리를 잡고서 그나마 남겨뒀던 비상금을 털어 '레소토 전국태권도대회'를 열였다. 대회가 성황을 이루면서 현지에서 태권도 붐이 일었고 협회가 결성돼 국가대표단도 꾸릴 수 있었다. 부임 1년 후 감독을 맡아 출전한 아프리칸대회에서 레소토는 준우승을 차지했고 제자들은 한국을 알리는 무도인들이 됐다.

박연환 사범이 친형 박연희 사범과 함께 배출한 블랙벨트 유단자 수는 미국에서만 3000명에 달한다.
박연환 사범이 친형 박연희 사범과 함께 배출한 블랙벨트 유단자 수는 미국에서만 3000명에 달한다.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로

태권도 사범으로서 2막은 불의의 사고로 레소토를 떠나게 되면서 펼쳐졌다. 북한이 쿠바와 공조해 레소토에 큰 지원을 약속하면서 우리 정부와 연을 끊은 것이다. 오갈데 없던 그는 케냐로 추방돼 귀국길에 올랐지만 세계인들에게 한국의 무도를 전파하겠다던 사명감은 더 커졌다. 그래서 곧바로 택한 목적지가 미국이다.


미국엔 친형인 박연희 사범(전미 태권도연맹 고문, 2019년 작고)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사실 그에겐 태권도 자체가 열살 터울인 형님의 멋진 모습에 반해 시작한 무도였다. 두 형제가 뉴욕 동부의 핵심, 롱아일랜드에 자리를 잡고 태권도를 미국 주류사회에 전파했다. 그 전까지 유행하던 쿵푸와 카라데를 몰아내고 다른 무술과 달리 태권도는 싸움이 아니라 심신수련을 본질로 하는 무도임을 알리는데 힘썼다.

한국인보다 덩치가 두 배 넘는 이들이 도장에 찾아와 싸움을 요구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박 사범은 먼저 수업을 마친 후 가장 큰 친구와 대련 해주기를 반복했다. 수련 과정에서 상대의 주동작과 장단점을 파악해 곧바로 실전에서 적용해 승리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제자들은 그제서야 눈빛이 달라졌다.

반의반의하던 이들은 작은 체구의 한국인이 큰 덩치의 동네 불량배를 혼내줬다는 소문을 냈고 그때마다 도장은 인산인해가 됐다. 수련자가 늘면서 경찰서장과 판검사, 지역 상공인들까지 몰려왔다. 사회적 성취를 이룬 이들이 자신의 심신을 단련할 목적으로 제자가 되길 꺼리지 않은 것이다.

박연환 사범이 운영하는 태권도 도장은 2023년 50주년을 맞았다.
박연환 사범이 운영하는 태권도 도장은 2023년 50주년을 맞았다.


88 서울올림픽서 미국 태권도를 세계 1위에 올리다

미국에서 그가 문화 외교관으로 남긴 족적 하나는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미국 대표팀 수석코치를 맡은 것이다. 당시 시범종목이었지만 종주국에 온 미국 제자들과 함께 주눅들지 않고 여자단체 1위, 남자단체 2위라는 믿지 못할 성과를 냈다. 이 결과로 미국에서 태권도 붐을 일으켰고 롱아일랜드대학에선 체육학과 부교수를 맡기도 했다.

3년 뒤 박 사범은 더 큰 도전에 나선다. 김운용 당시 IOC(국제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이 세계태권도대회의 미국 뉴욕 유치 미션을 주자 친형과 함께 스포츠 전당인 메디슨스퀘어가든(MSG)을 개최지로 정해두고 2년여를 몰두한 것이다. 빠듯한 예산과 시간에도 두 형제가 스스로의 가산을 탕진하면서까지 노력하자 길은 열리기 시작했다.

우여곡절 끝에 대회는 1993년 수만명이 운집한 가운데 성황리에 열렸다. 미국 ABC방송의 생중계로 이 대회는 세계 곳곳으로도 전파를 탔고 태권도의 위상을 미국 프로농구나 미식축구급으로까지 올렸다는 평가를 얻었다. 이듬해인 1994년 파리 IOC 총회에서 태권도는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됐다.

고국에서 대통령과 국무총리 표창을 받은 박연환 사범은 전미 태권도연맹 사무총장을 끝으로 미국 지역사회로 돌아가 헌신하고 있다. 지난해 50주년을 맞은 도장에서 그는 3000명에 달하는 블랙벨트(유단자) 제자들을 작고한 친형과 함께 배출해냈다. 도장은 이제 큰아들에게 가업으로 물려주고 현업에선 물러났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인의 삶까지 은퇴한 건 아니다.

지난해 그는 미국 태권도 지도자연맹이 주관하는 뉴욕 오픈 챔피언십 대회장을 맡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감염병 대유행)으로 멈췄던 대회를 부활시켰다. 박연환 사범은 "다시 태어나도 대한민국의 국기를 세계에 알릴 수 있는 무인의 삶을 살겠다"고 강조했다.

박연환 사범(사진 윗줄 오른쪽)은 은퇴한 이후에도 제자들과 수련하며 태권도를 미국 사회에서 알리고 있다.
박연환 사범(사진 윗줄 오른쪽)은 은퇴한 이후에도 제자들과 수련하며 태권도를 미국 사회에서 알리고 있다.





◆박연환 프로필
1952년 6월 전라북도 정읍 출생
1977년 고려대학교 사학과 졸업 및 해병대 복무 소집해제
1978년 아프리카 레소토 공화국 태권도 사범 파견 및 레소토 국가대표 감독 역임
1980년 미국 이주 및 뉴욕주 롱아일랜드 도장 개설
1988년 서울올림픽 미국 국가대표 수석코치
1993년 전미 태권도연맹 코치 및 사무총장 역임
- 롱아일랜드 한인회 3대 회장, 롱아일랜드 대학교 체육학과 부교수, 뉴욕오픈태권도대회 대회장 등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