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정학적 리스크들과 전기차 캐즘이 호재로 작용하며 정유 4사의 실적 안정이 길어질 것으로 보인다. 사진은 SK이노베이션 울산CLX 전경. /사진=SK이노베이션 제공


국내 정유 4사가 정제마진 반등과 원가 경쟁력 확보에 힘입어 실적 개선에 성공했다. 글로벌 정유 설비 조정 기조와 전기차 수요 둔화가 맞물리며 실적 안정이 장기화될 거란 전망이 나온다.


20일 업계에 따르면 SK에너지의 지난해 4분기 연결 기준 영업이익은 2828억원으로 잠정 집계됐다. 전년 동기(1727억원) 대비 63.8% 증가했다. 같은 기간 에쓰오일(S-Oil)은 90.9%, GS칼텍스는 136.5% 늘었다. HD현대오일뱅크는 234.2% 증가하며 가장 큰 폭의 상승세를 보였다.

실적 개선의 주된 요인으로는 정제마진 반등이 꼽힌다. 이달 첫째 주 복합 정제마진 평균은 배럴당 11.6달러(약 1만6837원)를 기록했다. 정제마진은 석유제품 판매가격에서 원유 구매비 등을 뺀 값으로 정유업계 수익성을 가늠하는 핵심 지표다. 지난해 상반기 3달러 선까지 떨어졌던 정제마진은 하반기 반등에 성공했다. 현재도 손익분기점으로 여겨지는 배럴당 4~5달러를 상회하고 있다.


지정학적 리스크도 국내 정유사들에게 호재로 작용하고 있다. 미국의 이란·베네수엘라산 원유 제재로 중국 티팟(산둥 소재 민간 정유사들) 기업들의 원가 경쟁력이 약화됐기 때문이다. 티팟 기업들은 중국 국영 석유기업과 달리 당국의 지원이 없어 가격이 저렴한 이란과 베네수엘라 원유를 구매해 가격 경쟁력을 확보해 왔다. 제재 강화로 중국 기업들의 저가 원유 조달이 제한되면서 국내 기업 가격 경쟁력이 상대적으로 높아졌다.

현 정유 4사의 실적 안정세가 장기화될 것으로 관측된다. 미국·유럽연합(EU) 등 선진국들은 유지비 부담, 탄소 규제, 수요 둔화 전망 등으로 정유 설비를 구조조정하고 있으나 신·증설 계획은 없어 공급 부족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한국무역협회는 미국 발레로 등 에너지기업들이 54만7000배럴 규모의 설비를 폐쇄하고 유럽 쉘·BP 등의 기업들이 일일 40만 배럴 규모의 설비를 폐쇄할 것이라 보았다. 향후 수급이 불안해질 경우 아시아 정유제품 수요가 늘며 대형·고도화 설비를 갖춘 국내 기업에 우호적으로 작용할 것으로 예측된다.


러시아 정유시설이 전쟁으로 타격을 입은 것도 국내 정유사들에겐 긍정적이다. 최대 경유 수출국 중 하나였던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드론 공격으로 일부 정유 시설 운영이 불가능하다. 러시아가 수급 안정을 위해 수출을 제한할 경우 공급 압력을 받아 온 아시아 기업들이 반사이익을 얻을 수 있다.

유가 안정도 전망을 밝게 한다. 사우디아라비아 국영 석유회사 아람코는 아시아향 대표 유종인 '아랍 라이트' 3월 공식판매가격(OSP)을 오만·두바이유 평균 가격과 동일한 수준으로 제시했다. 이는 최근 5년간 최저 수준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종전 가능성이 커지고 베네수엘라 원유 생산이 확대되는 등 공급 확대 가능성이 커지자 점유율 방어를 위해 가격 조정에 나선 것으로 분석된다. 추가 인하 가능성도 제기된다.


전기차 보급 속도 둔화도 호재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전기차 상용화로 내연기관차 수요가 줄어 2030년부터 석유 수요가 감소될 것으로 예측했으나 전기차가 캐즘(일시적 수요 둔화)이 장기화되자 수요 둔화 시점을 2050년으로 늦췄다. 석유 수요 감소 시점이 늦춰지며 정유사들에게 우호적인 환경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업계 관계자는 "정제마진 등 여건이 개선돼 실적 회복 흐름은 당분간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면서도 "지정학적 변수와 경기 민감도가 큰 산업 특성상 낙관하긴 이르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