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동행] 31km에 새겨진 함성…화성 '3·1 만세길'을 걷다
화성=김동우 기자
공유하기
"일제 강점기는 캄캄하고 추웠던 계절이었다."
생전 할머니의 기억 속 일제는 어린아이의 눈에도 서럽고 고난 가득한 겨울이었다. 그 어둠을 뚫고 목숨을 건 만세로 추위를 이겨냈던 선조들의 발자취가 107년이 지난 오늘, 하나의 '길'로 되살아났다.
1919년 4월3일 새벽, 경기도 화성군 장안면 주곡리에 모인 30여 명의 '만세꾼'들은 오후 5시까지 화성 일대를 누비며 독립을 외쳤다. 시위대는 순식간에 2000명으로 불어났고, 화성 3·1운동은 평화 시위를 넘어 일제 통치기관인 면사무소를 불태우고 일본 순사를 처단하는 격렬한 무력항쟁으로 전개됐다. 당시 화성의 만세운동은 3·1운동 기조와 달리 무력항쟁이었다.
이 때문에 일제의 보복에 크나큰 희생도 치렀다. 일제는 15일 군대를 투입해 제암리 주민 20여명을 교회에 가두고 총살하고 민가를 불태웠으며(제암리 학살사건), 인근 고주리에서는 독립운동가 김흥렬과 일가 6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107년 전 만세운동이 절정으로 치달았던 화성시 우정읍 화수리에는 '3·1운동 만세길 방문자센터'가 들어서 있다.
화성3.1운동만세길의 개통으로, 만세길을 찾는 방문객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만세길 답사·체험활동의 기회를 안내하고자 만세 만세길방문자센터가 탄생하게 됐다. 만세길 방문자센터는 리모델링을 거친 후 새로운 공간으로 거듭났다.
화성특례시는 (구)우정보건지소 건물의 흔적과 현재의 시간이 공존하는 곳에서 만세길을 찾는 방문객들에게 추모의 공간이자 휴식의 공간으로 쓰일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편의시설을 마련했다.
이곳을 기점으로 화성 3·1운동의 뜨거웠던 역사가 다시 숨 쉬기 시작한다. 방문객들은 센터를 나서는 순간, 31km '만세길'을 따라 107년 전 그날의 함성 속으로 걸어 들어가게 된다.
화성시는 2019년 만세운동 100주년을 기념해서 약 5년 동안 고증을 거쳐 만세꾼들이 태극기를 들고 행진했던 투쟁과 희생의 길을 연결했다. 화성3.1운동 만세길은 우정읍 주곡리에서 장안면 석포리, 수촌리와 장안면사무소를 거쳐 우정읍 쌍봉산에 이르기까지 총 31km에 달하는 길이다.
독립운동가 차희식·차병혁·백낙열·김연방·최진성 선생의 생가나 집터, 횃불 시위가 벌어진 개죽산,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쌍봉산, 옛 장안면·우정면사무소터 등 15개 주요 지점을 연결했다.
"역사를 잊지 말자는 취지에서 과거를 잘 모르는 학생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무거운 역사를 전하는 일에 부담감도 있지만, 확실하고 진실된 자세로 역사를 전할 수 있어 보람을 느낍니다."
화성 3·1운동 만세길에서 만난 화성시문화재단 독립운동문화팀 김영희 학예사는 화성 지역 독립운동사의 가치를 보존하고 알리는 일에 강한 사명감을 보였다. 김 학예사는 현재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과 만세길 전체를 관리·운영하며 유물 기증, 연구, 해석 등 다방면에서 학예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화성 3·1운동 만세길의 핵심은 1919년 4월3일, 장안면과 우정면 면민들이 전개한 격렬한 항쟁에 있다. 당시 면민들은 일제의 통치 기구인 관청을 파괴하고 대규모 만세 시위를 벌였다. 특히 '화수리 항쟁'으로 불리는 사건은 화성 지역 항쟁의 치열함을 여실히 보여준다.
당시 일제는 '조선 태형령'을 앞세워 재판 없이 한국인을 구타하고 독립운동 주동자 색출에 열을 올렸다. 공포 통치의 상징이었던 화수리 주재소에서 일본인 순사 가와바타가 군중을 향해 총을 쏘아 사상자가 발생하자, 분노한 면민들이 그를 처단하며 독립을 향한 강력한 의지를 표출한 것이 화수리 항쟁의 골자다.
김 학예사는 만세길의 주요 지점 중 '쌍봉산'과 '차병혁 선생 가옥'을 꼭 방문해야 할 장소로 추천했다.
"수촌리 개죽산의 봉화를 신호로 쌍봉산 등에서 일제히 봉화가 치솟았고, 산 위에 모인 군중은 만세를 불렀습니다. 산 정상은 인근 마을 어디서든 잘 보여 시위를 독려하기에 최적의 장소였죠. 만세 시위를 주도한 차병혁 선생의 가옥은 당시 독립운동가의 삶을 짐작할 수 있는 의미 있는 공간입니다."
총 길이가 31km에 달하는 만세길은 하루 만에 모두 돌아보기에는 쉽지 않은 코스다. 김 학예사는 지점을 나누어 여러 번에 걸쳐 체험할 것을 권장했다. 처음 방문하는 이들에게는 만세길 방문자센터를 시작으로 화수리 주재소 터와 최진성 집터까지 이어지는 약 2km 구간(도보 왕복 60분)이 적당하다.
화성시는 사건 기록과 재판 증거 등 철저한 역사적 고증을 바탕으로 이 길을 복원했다. 김 학예사와 화성시문화재단의 노력은 단순히 길을 닦는 것을 넘어, 107년 전 그날의 뜨거웠던 함성을 오늘날의 세대에게 전달하는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아빠와 함께 방문했다는 이민하(초등 5학년) 양은 "이번 방문으로 많은 깨우침을 얻고 있다. 먼저 역사를 바라보 는 시선에 조금씩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며 의미를 부여했다. 아빠 이중석(37세) 씨도 "역사를 공부하면서 되도록 사실과 반증, 유물에 남겨진 흔적을 바탕으 로만 해석하잖아요. 고증이라는 작업 자체가 사실 만을 기반하여 해설해야 한다는 인식이 강했죠. 그런데 만세길을 걷고 공부하면서 3.1운동의 역사를 감정적인 부분을 모두 배제하고 해석할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수촌교회와 최진성 집터, 송산 3·1기념공원은 일제의 잔혹한 탄압 속에서도 굴하지 않았던 민초들의 저항 정신을 상징하는 주요 거점으로 평가받는다.
수촌교회는 1905년에 설립된 교회로 만세운동 당시 주요한 근거지가 됐다. 2000여 명의 군중이 참여한 만세시위의 보복으로 일제는 수촌리 마을의 가옥 42채 중 38채를 불태웠고, 그 과정에서 교회마저 파괴했다. 폐허가 된 마을과 전소된 교회는 사진 자료로 남아 일제 식민 통치의 실상을 드러내는 데 영향을 끼쳤다. 현재 수촌교회는 복원된 목조 예배당과 양옥 예배당이 나란히 자리 잡아 그날의 기억을 증언하고 있다.
최진성 집터에는 결전의 날 최진성가 뒷동산에 올라 횃불을 올리며 만세를 불렀던 그때의 함성이 들리는 듯 하다. 그는 시위 후 일제의 검거망을 피해 달아났고, 일본군은 보복으로 그의 집에 불을 질렀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합심하여 독에 든 간장으로 불을 껐다. 시간이 지나 최진성의 집은 사라졌지만 그 터에는 그를 기억하기 위한 '만세문' 조형물이 설치됐다. 녹슬고 단단한 문안으로 들어가면 철을 통과해 몸에 닿는 빛의 조각들이 희망의 메시지처럼 느껴진다.
송산 지역의 독립 정신을 기리는 송산 3·1기념공원에는 11.5m 높이의 기념탑이 우뚝 서 있다. 하단의 화강석은 우리 민족의 굳건한 역사를, 전면의 부조는 일제 경찰을 밟고 독립만세를 외치는 군상을 표현해 당시의 역동적인 함성을 시각적으로 재현했다.
한편, 화성시는 이러한 역사적 자산을 체계적으로 보존하기 위해 지난 2월1일 '만세구'를 공식 출범시켰다. 송산, 서신, 우정 등 만세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됐던 지역을 아우르는 명칭이다.
홍노미 화성특례시 1호 만세구청장은 만세구의 정체성을 강조하며 "지역에서 뜨겁게 전개됐던 3·1 독립 만세 운동의 정신을 후대에 잘 이어 계승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저작권자 ⓒ ‘존중받는 개인, 부강한 대한민국’ 시대,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보도자료 및 기사 제보 ( [email protected] )>
-
화성=김동우 기자
'동행미디어 시대' 경기 지역을 담당하고 있는 김동우 기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