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26일 서울 중구 한국은행 본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사진=뉴스1


한국은행이 고환율과 외국인 자금 이탈 우려 속에서 통화정책의 구조적 한계에 부딪혔다는 지적이 나온다. 2008년 금융위기에 이어 코로나19 회복 국면에서도 '물가 안정'이라는 단일 목적에 묶여 제 역할을 못 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치권과 학계를 중심으로 한은의 역할과 권한을 확대하는 내용으로 '한국은행법(한은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에도 힘이 실린다.

외환위기 후 힘빠진 한은, 위기대응력 하락으로

서울 중구 한국은행 본관 로비에는 '물가안정'이라는 네 글자가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중앙은행의 존재 이유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문구다. 하지만 물가만으로 한은의 역할을 설명하기에는 오늘날의 경제 환경이 너무 복합적으로 변했다. 물가는 비교적 안정적인 흐름을 보이지만 성장 둔화와 금융안정, 환율 변동 등 변수들이 동시 다발적으로 이슈를 만들어내며 중앙은행의 바람직한 역할이 무엇이어야 하느냐는 논의도 더 거세진 것이다.


그 중심에는 기준금리라는 하나의 수단에 과도한 기대와 의미를 두는 정책 구조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은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통화신용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하는 일이다. 국내 유일한 화폐 발행기관으로서 경제가 적정 수준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경제 상황에 맞게 통화량을 조정한다. 돈의 공급을 늘려 경기를 떠받치고 과열 국면에서는 유동성을 흡수해 인플레이션 압력을 낮춘다. 결국 중앙은행 정책의 핵심 목표는 돈의 가치, 즉 물가를 안정시키는 것이다. 이를 위한 대표 수단이 중앙은행과 금융회사 간 거래의 기준이 되는 기준금리 결정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복잡해진 경제 환경에서 금리라는 하나의 수단만으로 물가와 성장을 동시에 정밀하게 타격하기엔 한계가 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거시건전성 정책 권한은 금융위원회가, 금융기관에 대한 미시건전성 감독과 검사 기능은 금융감독원이 맡고 있다. 한은은 1998년 외환위기 당시 은행 감독권을 금감원에 내준 이후 현재는 금감원에 금융기관 공동 조사·검사 요구만 할 수 있는 처지다.


이창용 한은 총재도 중앙은행의 정책 수단이 제한돼 있다는 점을 여러 차례 언급해왔다. 이 총재는 지난해 아시아개발은행(ADB)과 국제통화금융저널(JIMF)이 공동 주최한 콘퍼런스 기조연설에서 "한은이 거시건전성 정책 수단과 미시 감독 권한을 보유하지 않아 정책 대응의 신속성과 유효성이 떨어질 수 있다"며 중앙은행의 감독 기능 강화 필요성을 공개적으로 제기했다.

이러한 정책 수단의 부재는 위기 상황일 때면 더욱 아쉽다. 16일 장중 원/달러 환율이 1500원을 돌파하는 등 추세적인 환율상승(원화절하)이 지속되고 있지만 한은은 금리를 쉽사리 올리지도 내리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코로나19 이후 경기 회복 국면에서는 주요국에 비해 금리 인상 폭이 적었다. 이 때문에 이후 경기 둔화 사이클에 접어들 때 금리인하 등 적극적인 통화정책을 펼칠 여유가 부족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과거 2008년 금융위기에서 회복되는 국면에서도 한은은 "금리를 올려야 할 때 올리지 못하다보니 내려야 할 때 내릴 여유가 없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당시에도 한은법상 한은이 물가 안정 수단만 갖도록 규정된 것이 대응력을 떨어뜨린 주범으로 꼽혔다.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전경./사진=머니투데이


이에 정치권을 중심으로 한은의 정책 목표를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도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한은의 정책 목표에 '고용 안정'을 추가하자는 한은법 개정론이 그것이다. 한은 정책목표 확대 필요성은 코로나19로 실업이 늘던 시기에 고용 안정이 국가적 과제라는 문제의식이 대두되며 제기됐는데 최근 다시 거론되고 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통화정책의 목표를 '물가 안정'과 '최대 고용'으로 삼고 있는 점 역시 이러한 주장에 힘을 싣는다. 주요국 중앙은행도 고용을 함께 책무로 두고 있는데 한국만 예외일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임수강 생산과포용금융연구회 부대표(경제학 박사)는 "중앙은행의 역할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며 "1980년대 이전에는 중앙은행들이 성장을 뒷받침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고 물가안정뿐 아니라 고용 확대나 불평등 완화와 같은 정책 목표도 함께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회에서도 관련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21대 국회에 이어 22대 국회에서도 정성호 의원 등 여야 의원들은 한은 설립 목적에 고용 안정을 명시해 물가 안정과 금융 안정, 고용 안정이 조화를 이루도록 통화정책을 운용하자는 내용의 개정안을 발의했다. 국회에서는 미국 연준처럼 고용 책무 도입 필요성을 둘러싼 공방이 벌어지기도 했다. 지난해 2월 10일 열린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경제재정소위에서 정태호 소위원장은 유상대 한은 부총재에게 "미국은 하는데 우리는 왜 못 하느냐"며 고용 목표 명시 가능성을 따졌다.


이에 유 부총재는 한은이 금융 안정까지 함께 고려해야 하는 구조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통화정책 수단이 제한돼 있는 상황에서 (정책) 목적을 자꾸 추가하는 건 정책의 초점과 책임 소재가 흐려질 수 있다"며 "기본적으로 물가 안정 목표 아래 금융 안정에도 유의해야 하는 상황에서 금리 정책의 목표에 고용 안정까지 추가되면 목표 간 상충이 커질 수 있고, 정책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한은 내부에서도 유사한 목소리가 나온다. 한은이 중앙은행으로서 제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목표를 늘리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한은법 개정안을 통해 실질적인 역할과 권한을 일정 수준 높여줘야 한다는 것이다. 한은이 거시경제의 사령탑으로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으려면 정책 목적과 정책 수단이 그만큼 다양하게 주어져야 한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한은 관계자는 "중앙은행의 본질적인 목표는 물가 안정이며 사실상 단일 목표에 가깝다"며 "조직에 목표가 여러 개라면 그만큼의 정책 수단도 함께 주어져야 하는데 현재 핵심 수단은 기준금리 하나뿐"이라고 말했다. 이어 "총알이 한 발뿐인데 토끼 세 마리(물가·고용·성장률)를 동시에 잡으라는 것과 같다"며 "총알 한 발로 세 마리를 맞히려면 토끼들이 일렬로 서 있어야 하지만 현실에서는 각자 다른 방향으로 뛰고 있어 구조적으로 쉽지 않다"고 토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