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이력이 부족해 은행 문턱을 넘지 못했던 소상공인들이 앞으로는 매출 흐름과 상권 경쟁력, 사업 성장성 등을 기반으로 대출을 받을 수 있게 된다. 금융당국이 담보와 과거 금융이력 중심으로 작동해 온 기존 신용평가 체계를 '데이터와 미래 성장성' 중심으로 전환하는 구조적 개편에 나섰다. 사진은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내 금융위원회 사무실./사진=뉴시스


금융 이력이 부족해 은행 문턱을 넘지 못했던 소상공인들이 앞으로는 매출 흐름과 상권 경쟁력, 사업 성장성 등을 기반으로 대출을 받을 수 있게 된다. 금융당국이 담보와 과거 금융이력 중심으로 작동해 온 기존 신용평가 체계를 '데이터와 미래 성장성' 중심으로 전환하는 구조적 개편에 나섰다.


금융위원회는 9일 서울 은행회관에서 '신용평가체계 개편 태스크포스(T/F) 제3차 회의'를 열고 '소상공인 특화 신용평가체계(SCB) 도입방안'을 발표했다. 이날 회의에는 금융위원장을 비롯해 금융감독원, 중소벤처기업부, 신용정보원, 주요 신용평가회사(CB), 시중은행, 소상공인연합회 등 정책 수요자와 현장 실무자들이 참석해 제도 도입 방향과 적용 방안을 논의했다.

소상공인 90% 담보대출…"성장성 평가 안 되는 구조"

이번 제도 개편은 소상공인의 금융 접근성이 구조적으로 제약돼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국내 소상공인은 약 790만개로 전체 사업체의 95%를 차지하고, 종사자 수 역시 1090만명으로 전체 고용의 절반 가까이를 담당하고 있다. 그러나 경기 둔화와 고금리·고물가·고유가가 겹치면서 경영환경은 빠르게 악화되고 있고 금융 부담 역시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문제는 이러한 현실이 신용평가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 구조에 있다. 현재 금융권의 개인사업자 대출은 대표자 개인의 신용도와 담보를 중심으로 심사되며 실제로 전체 대출의 약 90%가 담보·보증대출 형태로 이뤄지고 있다.

이 과정에서 매출이 증가하고 사업이 성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표자의 과거 금융이력이 부족하거나 신용점수가 낮다는 이유로 대출이 거절되는 사례가 반복돼 왔다. 사업성과와 신용평가 결과 사이의 괴리가 구조적으로 발생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또 최근 소상공인의 영업 환경이 온라인 플랫폼과 디지털 거래 중심으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음에도 이러한 변화 역시 신용평가에는 충분히 반영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도 한계로 지적됐다.

"담보 아닌 데이터"…AI 기반 신용평가 도입

신용평가모형(SCB) 구조./자료=금융위원회


이 같은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금융당국이 도입하는 것이 소상공인 특화 신용평가모형(SCB)이다.

SCB는 기존처럼 대표자의 금융이력에만 의존하지 않고 사업장의 매출과 업종 특성, 상권 내 위치, 고객 수요, 온라인 활동 데이터 등 다양한 비금융 정보를 종합적으로 분석해 사업의 미래 성장 가능성을 평가하는 구조다.


특히 이 모형은 인공지능(AI)을 활용한 계량 분석과 정성 평가를 결합한 형태로 설계됐다. 매출 증가율과 업력, 근로자 수, 거래 패턴, 온라인 플랫폼에서의 활동성 등 다양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사업의 성장 확률을 계산하고 여기에 사업자의 역량이나 상권 특성, 서비스 경쟁력, 인지도, 지식재산권 보유 여부 등 정성적 요소를 함께 반영해 평가의 정확도를 높인다.

이렇게 산출된 '성장등급(S등급)'은 기존 신용등급(CB등급)과 결합돼 최종 신용평가 결과에 반영된다. 성장성이 높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는 기존 신용등급보다 유리한 조건이 적용되도록 설계됐다.

즉, 같은 신용등급이라도 성장 가능성이 높은 사업자는 대출 승인 가능성이 높아지고 대출 한도 확대나 금리 우대 등 실질적인 금융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구조다.

연 70만명 혜택…"금융 공급 구조 바뀐다"

금융당국은 이 같은 평가체계가 안착될 경우 소상공인 금융 공급 구조 자체가 변화할 것으로 보고 있다.

성장성이 높은 소상공인에게는 신규 대출 승인과 추가 자금 공급이 확대되면서 연간 약 70만명 수준에서 금융 접근성이 개선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따라 연간 약 10조5000억원 규모의 신규·추가 대출 공급이 가능해지고 금리 부담 역시 일정 부분 완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기존에는 금융이력이 부족해 고금리 대출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소상공인들이 제도권 금융으로 유입되는 효과가 기대된다.

실제 사례를 보면 매출이 증가하고 온라인 주문이 확대된 반찬가게 운영자가 기존 평가에서는 낮은 신용등급으로 인해 연 20% 수준의 고금리를 적용받을 상황이었지만 SCB 적용 이후에는 성장성이 반영되면서 5%대 금리로 은행 대출을 받을 수 있게 되는 식이다.

단계적 도입…2028년 전 금융권 확대

소상공인 통합정보센터(SDB) 구축 및 활용안./자료=금융위원회


SCB는 2026년 하반기부터 일부 은행을 중심으로 시범 적용된다. 초기에는 기업은행, 농협은행, 신한은행, 우리은행, 국민은행, 하나은행, 제주은행 등 7개 은행이 참여해 약 1조8000억원 규모의 소상공인 대출 심사에 활용될 예정이다.

이후 시범운영 결과를 바탕으로 모형을 보완하고 금융회사별 특성에 맞는 평가모형으로 고도화하는 작업이 진행된다. 중장기적으로는 금융권 전반으로 확대 적용되며, 일정 시점 이후에는 SCB 활용 실적이 금융회사 평가와 인센티브 체계에도 반영될 계획이다.

신용평가모형 도입과 함께 데이터 인프라도 함께 구축된다. 금융위원회는 신용정보원 내에 소상공인 통합정보센터(SDB)를 마련해 사업장 정보와 매출, 고용, 거래 데이터 등 다양한 비금융 정보를 체계적으로 수집·관리할 계획이다.

이 데이터는 금융회사와 신용평가회사에 제공돼 신용평가 정확도를 높이는 데 활용되고 동시에 소상공인 맞춤형 금융상품 개발과 컨설팅에도 활용된다.

또 평가 결과에 영향을 미친 주요 요인을 설명하는 서비스도 제공해 신용평가의 투명성과 이해 가능성을 높인다는 방침이다.

"자금 흐름 바꾸는 전환점"…금융 패러다임 변화

금융당국은 이번 개편을 단순한 제도 개선이 아닌 금융 패러다임 전환으로 보고 있다.

이억원 금융위원장은 "그동안 금융은 손실 위험을 쉽게 측정할 수 있는 담보와 과거 이력에 의존해 왔지만 그 과정에서 성장 가능성과 맥락적 정보는 충분히 반영되지 못했다"며 "이제는 다양한 데이터와 AI를 통해 미래 가치를 평가하고 이를 금융 의사결정에 반영하는 시대"라고 강조했다.

이어 "소상공인에 대한 금융지원은 단순한 지원 확대가 아니라 성장성이 있는 곳에 자금이 흐르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핵심"이라며 "이번 신용평가체계 개편이 그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