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2가 대로변 건물에 ‘임대’ 안내문이 붙어 있다./사진=뉴스1


체납세금 때문에 금융권 문턱에서 막혔던 영세 자영업자에게 재기의 문이 열렸다. 경기 회복 흐름에도 영세 자영업자의 체감경기는 여전히 어렵고 사업 부진으로 폐업하는 개인사업자도 매년 늘고 있다. 정부는 생계형 체납자의 체납세금 부담을 덜어 다시 경제활동에 나설 수 있도록 지원한다.


국세청은 지난 3월부터 폐업한 영세 자영업자를 대상으로 '체납액 납부의무 소멸'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이 제도는 납세자의 체납 원인, 납부 능력 등 실태조사를 통해 징수가 곤란하다고 인정되는 생계형 체납자의 체납세금 납부의무를 소멸시키는 제도다. 대상은 2025년 1월 1일 이전에 발생한 종합소득세와 부가가치세 체납액이다. 이에 붙는 가산세, 가산금, 강제징수비도 포함된다. 소멸 가능한 체납액은 최대 5000만원이다.

국세청이 이 제도를 꺼낸 배경에는 폐업 자영업자의 증가가 있다. 개인사업자 폐업은 2021년 81만9000명에서 지난해 92만5000명으로 늘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이후 이어진 고금리·고물가와 내수 부진이 겹치면서 영세 자영업자의 경영 부담이 커진 영향이다.


이 가운데 사업 부진으로 폐업한 개인사업자는 같은 기간 37만5000명에서 47만명으로 증가했다. 사업 실패나 경기 부진으로 세금을 내지 못한 체납이 장기화되면 납세자는 재산 압류뿐 아니라 정상적인 경제활동에도 제약을 받게 된다.

폐업·무재산 영세자영업자 대상…홈택스·세무서서 신청

체납액 납부의무 소멸을 받으려면 몇 가지 요건을 모두 충족해야 한다. 먼저 실태조사일 이전에 모든 사업을 폐업해야 한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체납액 납부가 곤란하다고 인정돼야 하며, 실태조사일 현재 소멸 대상 체납액이 5000만원 이하여야 한다. 폐업 직전 3년간 사업소득 총수입금액 평균액은 15억원 미만이어야 한다.

5년 이내 '조세범 처벌법' 상 처벌을 받았거나 조사가 진행 중인 경우 등은 제외된다. 과거 납부의무 소멸 제도를 적용받은 사람도 대상에서 빠진다. 신청은 가까운 세무서를 방문하거나 홈택스를 통해 할 수 있다.


절차는 신청, 실태조사, 국세체납정리위원회 심의, 결정·통지 순으로 진행된다. 세무서장은 신청자의 납부능력을 확인하기 위해 주소지를 방문해 생활여건을 살피고 소득·재산 현황 등을 파악한다. 이후 국세체납정리위원회 심의를 거쳐 신청일로부터 6개월 이내에 납부의무 소멸 여부를 결정해 신청자에게 통지한다.

국세청에 따르면 지난해 1월 1일 기준 종합소득세와 부가가치세 체납액 합계가 5000만원 이하인 체납자는 28만5000명이다. 이 가운데 폐업, 무재산 등 법정 요건을 충족할 것으로 예상되는 납세자부터 우선 안내할 계획이다.


지난 3월 출범한 국세 체납관리단을 중심으로 신청자의 주소지를 방문해 생활실태와 경제상황 등을 확인하고, 거동이 불편해 직접 신청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담당 공무원이 납세자 동의를 받아 대신 신청하도록 지원한다.


체납 정리도 포용금융의 과제…"6개월 공백 줄여야"

이번 제도는 포용금융의 흐름과도 맞닿아 있다. 국세 체납은 단순한 세금 문제가 아닌 금융 접근성을 막는 장벽으로 작용할 수 있어서다. 체납이 있으면 '체납 사실이 없다'는 납세증명서 발급이 제한돼 금융기관 대출 심사나 자금 조달 과정에서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

국세청에 따르면 체납액이 150만원 이상이면 납부할 때까지 매일 납부지연가산세가 붙어 체납액이 불어난다. 체납액이 500만원 이상이고 체납 발생일로부터 1년이 지나거나, 1년에 3회 이상 체납한 경우에는 금융기관에 신용정보가 제공된다. 이 경우 신용도가 하락하거나 신용카드 발급이 거부될 수 있다. 체납이 금융배제의 출발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생계형 체납자에게 더 큰 문제는 체납 정보가 남아 있는 동안 재기를 위한 지원을 받는 것도 어려워진다는 데 있다. 체납 정보 때문에 정책서민금융이나 금융회사 대출 심사에서 막히면 실제 상환 여력이나 재기 가능성과 무관하게 제도권 금융 밖으로 밀려날 수 있다. 체납액 납부의무 소멸 제도는 단순히 체납세금을 덜어주는 조치를 넘어 체납으로 막힌 금융 접근성을 회복시키는 재기 지원 장치로 볼 수 있다.

국세청은 이번 제도를 통해 체납으로 사업자나 장사가 어려운 납세자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는 동시에 납부능력을 고려한 맞춤형 체납관리 체계로 전환하겠다는 구상이다.

다만 현장에서는 처리 기간에 대한 우려도 나온다. 체납액 납부의무 소멸은 신청 이후 실태조사와 국세체납정리위원회 심의를 거쳐 결정되는데, 이 과정이 최대 6개월까지 걸릴 수 있다. 그 사이 체납 정보가 남아 있으면 정책서민금융 대출 진행이 막히는 등 금융지원 공백이 발생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김은경 서민금융진흥원장은 "제도상 실태조사와 심의 절차는 필요하지만 생계형 체납자에게 6개월은 너무 긴 시간일 수 있다"며 "필요시 국세청과 업무협약을 맺는 등 생계형 체납자를 더 빨리 확인해 서민금융 지원으로 연계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