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발 지정학적 리스크가 완화되고 있지만 원/달러 환율은 1500~1510원대를 유지하는 모습이다. 사진은 지난 14일 서울 중구 명동 환전소에 환율이 표시된 모습. /사진=뉴스1


중동 전쟁이 사실상 종전 국면에 접어들면서 국제 유가와 위험회피 심리는 진정되고 있지만, 원/달러 환율은 좀처럼 1500원 아래로 내려가지 않고 있다. 통상 지정학적 리스크가 완화되면 안전자산 선호가 약해지면서 환율도 하락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번엔 외국인 자금 이탈과 구조적인 달러 수요 지속으로 원화 약세가 이어지는 상황이다. 시장에선 중동 변수와 환율 간 연동성이 약해지는 이른바 '디커플링(탈동조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전문가들은 전쟁 변수보다 국내외 달러 수급 구조와 외국인 자금 흐름, 주요국 통화정책 변화가 환율을 좌우하는 국면에 접어들었다고 진단한다. 미국과 이란이 14일(현지시각) 종전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하며 중동발 불확실성이 완화되는 분위기지만 원/달러 환율은 15일 1511.1원에 마감하며 고환율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

앞서 원/달러 환율은 지난 5일 장중 1562.47원까지 치솟으며 연고점을 경신했고, 7일에는 1559.55원에 거래를 마쳤다. 이후 8~11일 1510원대까지 내려온 뒤 12일과 14일 소폭 반등했으며, 이날도 1510원대에서 마감했다.


최진호 우리은행 이코노미스트는 "월초부터 중순까지는 수입업체들의 결제 수요가 집중되는 시기"라며 "환율이 1500원 초반으로 내려오자 오히려 달러 매수세가 유입되면서 하단이 지지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전쟁 종료는 달러 약세 요인이지만 외국인 주식 순매도와 달러 수요 등 수급 요인이 함께 작용하면서 환율이 예상보다 천천히 내려가고 있다"며 "일시적으로 1500원을 밑돌 수는 있겠지만 구조적 수급 여건이 해소된 건 아니다"고 진단했다.


외국인 자금 이탈도 환율 상승 압력을 키우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달 외국인의 국내 증권투자자금은 261억5000만달러 순유출을 기록했다. 지난 4월(21억3000만달러 순유출)보다 유출 규모가 12배 이상 확대됐다.

주식자금이 318억3000만달러 순유출되며 전체 자금 흐름을 끌어내렸다. 세계국채지수(WGBI) 편입 효과 등에 힘입어 채권자금은 56억8000만달러 순유입됐지만, 주식시장 이탈을 상쇄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국내 증시 급등에 따른 차익실현과 포트폴리오 재조정이 대규모 순매도로 이어졌다는 게 한국은행의 설명이다. 올해 들어 외국인 자금은 지난 2월 이후 4개월 연속 순유출을 이어갔다. 올 들어 5월까지 누적 유출 규모는 702억달러에 달한다.

"전쟁 이전 수준으로 회귀? 상당한 시간 걸릴 것"

전문가들은 국내 달러 수급 구조 자체가 과거와 달라졌다는 점에도 주목하고 있다. 최 이코노미스트는 "과거에는 수출기업들이 벌어들인 달러가 현물환 시장에서 공급됐지만, 최근에는 해외 투자 확대 등으로 달러를 국내에서 환전하기보다 해외에서 재투자하거나 스와프 시장을 활용하는 경우가 많아졌다"고 설명했다.


이어 "반도체 기업들이 미국 공장 투자 등을 위해 달러를 계속 보유하는 구조가 형성되면서 과거처럼 수출 증가가 곧바로 원화 강세로 연결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시장에선 하반기 외환시장의 핵심 변수로 국제 유가와 주요국 통화정책, 중국 환율 정책 등을 꼽는다.

오건영 신한 프리미어 패스파인더 단장은 "호르무즈 해협을 둘러싼 불확실성이 얼마나 해소되는지와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한국은행, 일본은행 등의 정책 방향이 어떤지가 중요하다"며 "전 세계적인 금리 인하 사이클이 마무리되고 다시 긴축 가능성이 거론되는 점이 하반기 환율 흐름의 핵심 변수"라고 평가했다.

최 이코노미스트는 "미국 물가가 다시 4%대로 올라가고 연준이 긴축 기조를 강화할 경우 달러 강세가 재개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일각에서는 원화가치가 빠르게 안정세를 찾아갈 것이라는 예상이 나오기도 한다. 박상현 iM증권 연구원은 "개인과 기업의 달러예금 증가, 해외 투자 확대 등 구조적인 달러 수요가 환율을 떠받치고 있다"며 "다만 중동 리스크 완화와 유가 하락이 이어지면 무역수지 개선과 함께 외국인 주식 매도 압력도 완화되면서 오는 7월에는 1400원대로 진입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그럼에도 시장에선 환율이 단기간에 전쟁 이전 수준으로 복귀하긴 쉽지 않을 것이란 신중론이 제기된다. 외환시장 참가자들은 중동발 긴장 완화만으로 원/달러 환율이 1500원 아래로 안착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미국과 이란 간 종전 합의 기대감이 형성되면서 환율 하방 압력이 커진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 MOU 이행과 호르무즈 해협을 둘러싼 불확실성 해소, 국제유가 안정 등이 확인돼야 추가 하락이 가능하다고 분석한다.

한 외환 딜러는 "최근 국민연금 선물환 매도와 주요 수출기업들의 달러 매도 물량, 외국인 순매도 진정 등이 맞물리면서 환율이 1560원대에서 1510원대로 빠르게 내려왔다"며 "다만 중동 리스크 완화만으로 1500원 아래로 내려가기 위해선 추가 재료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시장 참가자들 사이에선 지난주 1550원대 급등 과정에서 당국의 실개입이 있었던 것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다만 중동 변수 완화만으로 환율이 단숨에 1400원대로 내려가기는 어렵고, 추가 달러 공급과 외국인 자금 유입 등 새로운 재료가 뒷받침돼야 1500원 아래에서 안착할 수 있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오 단장은 "전쟁은 종결 국면으로 가고 있지만 국제유가가 여전히 배럴당 80달러 안팎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 상흔이 남아 있음을 보여준다"며 "전쟁 이전 수준으로 돌아가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원화는 최근 1년 반 동안 엔화와 높은 연동성을 보였는데, 엔화 역시 약세를 이어가고 있어 원화만 빠르게 강세로 돌아서기 어렵다"며 "국내 달러 수급 부담도 여전해 환율이 쉽게 안정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진단했다.

최 이코노미스트는 "미국 물가가 다시 4%대로 올라가고 연준이 긴축 기조를 강화할 경우 달러 강세가 재개될 수 있다"며 "오는 7~8월에는 1400원 후반~1500원 초반에서 등락하다가 미국 인플레이션이 재차 자극될 경우 1530~1550원대로 다시 상승할 가능성도 있다"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