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9일 군 장병들이 서울 용산구 한남동주민센터에서 6·3 지방선거 사전투표에 참여하고 있다./사진=뉴스1


2012년 봄 런던 세인트판크라스 기차역에서 대학 선배와 조우했다. 나는 파리행 유로스타를 타려고 갔고, 프랑스에서 유학하다 정착해 사업가가 된 그는 일 때문에 영국에 왔다고 했다. 다음 날 치러질 프랑스 대통령 선거 취재 출장 길에 오른 나는 가벼운 농담을 던졌다. "사회당 열성 지지자가 투표 안 하면 어떡해요?" 그러자 그는 "투표는 동네 친구한테 부탁했어"라고 답했다. 내 표정에서 '이해 안 됨'을 알아차린 그가 "대리투표 제도라는 게 있어. 가족이나 이웃에게 위임장만 써 주면 돼"라고 설명했다.


'내 표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게 민주사회에서 가능한 일인가? 서구 민주주의의 한 축인 프랑스에서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의문이 솟구쳤다. 나는 "부탁 받은 친구가 올랑드(사회당 대선 후보) 말고 다른 데 찍을 수도 있잖아요?"라고 물었다. 그는 빙긋이 웃으며 "그러니까 믿을 만한 사람에게 부탁을 하지. 배신해도 알 수는 없지만"이라고 대답했다.

작은 충격이었다. 유럽 특파원으로 프랑스에서도 2년 동안 산 적이 있는데 대리투표(위임투표) 제도의 존재 자체를 몰랐다. 한국에서 자라면서 선거의 4대 원칙(보통·평등·직접·비밀)을 외우고 또 외웠다. 대리투표는 언감생심, 해서도 안 되고 할 수도 없는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그런데 멀쩡한 나라에서 버젓이 시행되고 있었다. 다음 날 프랑스 투표소 앞에서 달랑 종이 한 장짜리 투표 위임장을 들고 온 사람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출장 마치고 런던으로 돌아와 알아보니 영국에서도 프랑스와 비슷한 대리투표제가 운영되고 있었다. 유럽에선 특이한 것도 아니었다. 벨기에와 네덜란드에도 있었다.


프랑스 대리투표제는 약 100년의 역사를 지녔다. 출장·여행·입원 등으로 투표 날에 동네 투표소에 갈 수 없는 유권자를 위한 것이다. 과거에는 한 사람이 두 명까지 대리할 수 있었으나 2022년부터 한 사람(해외 체류자 대리 경우는 두 명까지)으로 제한됐다. 투표구가 다른 인척이나 친구에게도 위임할 수 있는데, 투표는 대리를 맡긴 사람의 지역으로 가서 해야 한다.

대리투표제 도입을 주장하고자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투표권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는 것에 지금의 한국인들이 동의하기 어렵다는 현실을 모르지 않는다. 당장 매수 위험, 권력 관계에 따른 부정 가능성이 제기될 수 있다. 실제로 영국과 프랑스에서 요양원 거주자 집단 위임, 가족 간 억지 위탁 등의 문제가 있었다. 처벌 강화 등의 대응책이 나왔지만 일탈을 완전히 해소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대리투표제를 소개하는 이유는 선거일에 투표하기 어려운 유권자를 위한 제도가 오로지 사전투표만은 아니라고 말하기 위해서다.


6·3 지방선거 진상규명위원장(중앙선거관리위원회 임명)을 맡았던 조현욱 변호사에게 21일 연락했다. 그는 앞서 19일 열린 진상조사 결과 발표 회견에서 사전투표 제도 유지 여부를 판단할 "공론화"를 언급했다. 그는 통화에서 "국민의 불신이 너무 커서 토론의 장을 열어 결정하는 게 필요하다는 취지였다"고 설명했다. 조 변호사는 "사전투표 투표지 보관과 이송 등의 과정은 엄정히 잘 이뤄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부정선거 의혹이 쌓여가고 그 중심에 사전투표가 있어 존치 여부를 숙고할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조 변호사는 몹시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사전투표 신뢰 회복 가능성을 희박하게 보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내친김에 고위 법관 출신의 현직 중앙선관위원에게도 사전투표 존속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솔직히 말해 사전투표 관리에 선관위의 힘이 부치는 것은 사실이다. 과부담 상태라고 볼 수 있다. 불신 때문에 사전투표에 더욱 신경을 쓰다보니 본투표에서도 실수가 나온다"고 말했다. 그는 익명을 부탁했다.


한국은 2012년에 사전투표제를 도입했다. 지금의 여권인 민주통합당에서 주도했다. 한국의 뛰어난 행정(전산) 능력 덕에 통합선거인명부가 만들어졌다. 그 결과로 직장이나 학교 근처에서 투표할 수 있게 됐다. 투표율이 올랐다. 그러나 5일 동안의 투표함 관리, 우편 발송, 별도 개표 등의 복잡한 과정이 수반됐다. 실수, 의혹, 음모론이 꼬리를 물고 재생산됐다. 사전투표와 본투표 사이의 후보자 사퇴로 '사표' 논란이 불거지기도 했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데도 투표를 미리 하고 선거일은 보통 휴일처럼 보내는 문화가 퍼졌다.

사전투표제 안착의 핵심 조건은 사회 신뢰 자본이다. 안타깝게도 우리 공동체의 국가 시스템에 대한 믿음은 높지 않다. 한국 국가데이터처가 지난해 말 발표한 사회조사 결과에서 "우리 사회를 신뢰한다"고 대답한 비율은 54.6%에 그쳤다. 반면 한국인의 정치적 민감도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이런 현실을 바탕에 깔고 사전투표의 효용성과 역효과를 진지하게 따져 보자. 우편투표(독일에서 활성화), 투표 시간 연장 등의 대안도 있다. 최근 리얼미터 여론조사에서 52.7%의 응답자가 사전투표 폐지에 찬성(44.2% 반대)했다. 언제나 옳은 제도는 별로 없다.
이상언 제도혁신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