숏폼 시대를 맞아 K팝은 3분30초의 서사 대신 15초의 강렬한 훅으로 승부하는 음악 문법으로 진화하고 있다. 사진은 그룹 코르티스(CORTIS)가 쇼케이스에서 곡 ‘REDRED’(레드레드) 무대를 선보이는 모습. /사진=뉴스1


"도입부 30초의 빌드업, 애절한 브릿지,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는 아웃트로. 과거 '음악'이라 부르던 서사는 이제 'K팝 유물'이 됐다."


최근 발매되는 K팝의 평균 러닝타임은 2분30초 안팎이다. 잔잔한 도입부로 분위기를 쌓고 브릿지에서 감정을 폭발시키던 이른바 '3분30초의 미학'은 사라진 지 오래다. 이제 K팝은 시작과 동시에 후렴구를 터뜨리며 몇 초 만에 리스너를 사로잡아야 하는 시대를 맞았다.

실제로 국내 최대 음원 플랫폼 멜론의 연간 차트 상위권을 분석한 결과 2000년대 초반 국내 히트곡의 평균 길이는 4분1초였지만 최근 히트곡들은 대부분 2분대다. 스트리밍 플랫폼이 음악 소비의 중심이 되면서 '짧고 강렬한 곡'이 새로운 표준이 된 것이다. 단순한 유행일까 아니면 음악 산업 전반의 구조적 변화일까.

완곡보다 중요한 15초?…숏폼이 바꾼 'K팝 문법'

변화의 중심에는 틱톡과 유튜브 숏츠, 인스타그램 릴스 등 숏폼이 있다. 이제는 '완곡'의 완성도보다 숏폼에 최적화된 '15초짜리 킬링 파트'가 음원 흥행의 성패를 가른다. 음원이 발매 전 챌린지 안무를 공개하고 중독성 강한 구간을 먼저 노출하는 마케팅이 K팝의 기본 공식이 됐다.


제작 방식도 달라졌다. 긴 빌드업을 과감히 생략하고 강력한 훅과 도파민을 자극하는 직관적인 비트를 전면에 내세운다. 이는 이른바 '어텐션 이코노미'(Attention Economy·주의력 경제)와 맞닿아 있다. 콘텐츠가 넘쳐나는 환경 속에서 이용자의 관심을 얻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경쟁력이 되면서 음악 역시 그 흐름에 맞춰 진화하고 있다.

실제로 최근 음원 차트를 저격한 최예나의 '캐치 캐치', 코르티스의 '레드 레드', 아일릿의 '잇츠 미' 같은 곡들이 그렇다. 한 번 들으면 쉽게 잊히지 않는 중독성 강한 가사와 직관적인 안무로 숏폼을 점령했다.


임희윤 대중문화평론가는 이 같은 변화를 시대적 흐름으로 봤다. 임 평론가는 "K팝은 원래부터 훅과 퍼포먼스 중심의 장르였고 숏폼 시대가 오면서 그 특성이 더욱 극대화됐다"며 "숏폼으로 음악을 소비하는 환경이 되면서 K팝이 원래 잘하던 것을 더 잘하게 됐다. 비주얼과 댄스 중심인 K팝 특성상 숏폼에 최적화되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숏폼은 음악 구조뿐 아니라 흥행 공식도 바꿨다. 그룹 투어스의 '오버드라이브'(OVERDRIVE)는 이른바 '앙탈 챌린지' 열풍을 타고 틱톡 내 관련 영상 230만건, 누적 조회수 44억회를 돌파했다. 이후 틱톡 '바이럴 50' 차트 상위권에 오르며 활동 종료 후에도 멜론 일간·주간 차트에서 상승세를 이어가는 역주행 현상을 보였다.
K팝은 숏폼을 발판 삼아 세계로 확장했지만 빠른 바이럴과 음악적 완성도 사이의 균형이라는 새로운 과제를 마주했다. 사진은 그룹 투어스 멤버들이 '앙탈챌린지'를 하는 모습. /사진=투어스 인스타그램 캡처


짧아진 노래, 과연 퇴보일까…'얼마나 빨리 퍼지는가'와 '얼마나 오래 기억되는가'

일각에서는 이 같은 변화를 음악적 완결성의 약화로 바라보기도 한다. 곡 길이가 짧아지면서 브릿지와 아웃트로가 사라지고 감정을 천천히 쌓는 과정이 줄어들고 있다는 지적이다. 팬들 사이에서도 "노래보다 챌린지가 먼저 떠오른다" "후렴구는 기억나지만 완곡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는 등의 피로감 섞인 반응이 나온다.


반대 시각도 있다. 짧은 러닝타임이 반드시 음악적 퇴보를 의미하진 않는다는 주장이다. 불필요한 반복을 덜어내고 핵심만 남기는 방식 역시 하나의 미학이 될 수 있으며 현대 대중의 소비 방식에 맞춘 자연스러운 진화라는 해석이다.

임 평론가 역시 "음악적 완성도의 기준은 시대와 미디어 환경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며 "숏폼의 영향으로 기승전결이 줄고 훅 중심의 구성이 많아졌다고 해서 음악적 완성도가 낮아졌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이어 "최근 한로로, 악뮤 같은 서정적인 음악과 기승전결이 살아 있는 음악들이 다시 주목받는 것도 하나의 반작용"이라며 "서사가 있는 음악과 훅 중심의 음악은 앞으로도 균형을 이루며 공존하게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숏폼은 분명 K팝의 글로벌 확장을 이끈 강력한 동력이다. 다만 숏폼 중심의 소비 구조가 음악 자체보다 '바이럴 가능성'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기 시작한 것은 아닌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지금처럼 댄스 음악과 아이돌 장르, 혹은 하나의 밈으로만 K팝이 소비된다면 성장의 한계는 명확해질 수밖에 없다.

임 평론가는 K팝의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해 '다양성'과 '다변화'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꼽았다. 그는 "과거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으나 순식간에 저물었던 홍콩 액션 영화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K팝을 아이돌 댄스 장르에만 국한하지 말고 한국 음악 전체의 브랜드를 고급화하고 다변화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러면서 "진정한 음악 강국이 되기 위해서는 마니아층이 골고루 존재하는 일본처럼 기초 음악 생태계가 탄탄해야 한다"며 "정부까지 발 벗고 나서서 대형 기획사나 성과 중심의 K팝에만 올인하는 지원 방식은 지극히 구시대적인 발상"이라고 지적했다.

몇 초 안에 시선을 사로잡는 힘은 중요하다. 하지만 노래가 끝난 뒤에도 리스너의 기억 속에 남는 힘 역시 음악 산업이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가치다. 숏폼의 빠른 속도감에 가려진 음악 본연의 가치를 되찾지 못한다면 K팝 전성기 역시 한때 유행한 '15초짜리 챌린지'처럼 순식간에 휘발될 수도 있다. '얼마나 빨리 퍼지는가'보다 '얼마나 오래 기억될 것인가'도 함께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