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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7시 58분, 강변북로는 오늘도 꽉 막혀 있다. 라디오에서는 익숙한 목소리로 교통정보가 흘러나온다. 정체를 공인해준다.
제길, 빠져나가려면 꽤 오래 걸리겠군.
8시 짧은 뉴스에 이어 시사 프로그램이 다시 시작된다. 여야 의원이 나와 오늘의 이슈를 토론한단다. 아침부터.
말이 좋아 토론이지, 자기 입장의 고함이다. 질문은 짧고, 답은 길고, 반박은 더 길다. 진행자는 중재하는 척하고, 출연자는 듣는 척한다. 각자 준비해온 말만을 꺼내놓는다.
나는 그런 목소리 속에서 핸들을 꽉 잡는다. 이 방송을 듣고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켜놓은 것이다.
시사 라디오는 부지런하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정치 뉴스를 쉬지 않고 나른다. 누가 누구를 공격했고, 누가 무슨 말을 번복했으며, 어느 쪽이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 취해야 하는지.
정보량은 꽤 많다. 그런데 하루가 끝날 무렵, 무언가를 많이 알게 됐다는 느낌보다 무언가에 많이 시달렸다는 기분이 든다. 분노는 쌓였고, 피로는 늘었는데, 달라진 것은 없다.
정치 뉴스가 나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시민은 알아야 하고, 권력은 감시되어야 한다. 말의 싸움도 때로는 필요하다.
다만 그것이 하루의 첫 번째 목소리여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눈을 뜨자마자 분노를 공급받고, 출근길부터 진영의 말투를 익히며, 커피 한 잔 다 마시지 못한 몸으로 국가의 운명을 걱정하는 일이 과연 건강한 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프랑스에는 '프랑스 앵테르(France Inter)'라는 공영 라디오가 있다. 뉴스와 시사를 다루는 대중 라디오이지만, 여름이면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한 명의 고전 작가나 한 편의 고전을 붙잡고 한 계절을 건넌다. 몽테뉴의 질문을 되묻고, 돈키호테와 산초의 대화를 다시 펼친다. 보들레르, 파스칼, 프루스트, 호메로스, 빅토르 위고 같은 이름들이 아침 공기 속으로 퍼져나간다.
목소리는 낮고 느리다. 결론을 서두르지 않는다. 오늘 반드시 알아야 할 쟁점도 없고, 내일 뒤집힐 속보도 없다. 대신 오래된 문장을 다시 읽는다.
사람은 왜 허영에 빠지는가.
우리는 왜 모험을 떠나는가.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
실패한 인간은 정말 실패한 인간인가.
당신의 분노는 당신의 것인가, 아니면 누군가 아침마다 주입해준 것인가.
방송은 책으로도 나왔다. 매년 한 편씩 쌓였다. '함께 하는 여름' 시리즈다. 라디오가 흘려보낸 말이 책이 되고, 여름의 목소리가 독서 목록이 된다.
TBS는 한때 사라질 위기까지 갔다. 옳고 그름을 따질 생각은 없다. 누군가는 지나치게 편향됐다고, 누군가는 불편한 방송을 압박하려 했다고 말할 것이다. 둘 다 어느 정도는 근거를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논쟁 너머에서 한 가지는 생각해볼 만하다.
살아 있을 때도 시사였고, 사라질 뻔할 때도 시사가 문제였다. 철학자를 불러 한 시간을 내준 적이 얼마나 있었는가. 시인이 나와 자기 시를 읽어준 적이 얼마나 있었는가. 공영이라는 이름을 달고도, 공적 사유를 위한 시간은 얼마나 있었는가.
공영 라디오가 정치의 도구가 되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우리는 그 일에는 자주 분노한다. 그러나 공영이 현실 정치만을 말하는, 그 빈곤에는 좀처럼 분노하지 않는다. 앞엣것은 권력의 문제고, 뒤엣것은 상상력의 문제다. 우리는 권력의 오용은 쉽게 알아채면서, 상상력의 부재는 너무 쉽게 당연하게 여긴다.
들린다는 것과 듣는다는 것은 다르다. 시사 라디오는 들린다. 철학 라디오는 듣게 한다. 전자는 귀에 닿고, 후자는 어딘가에 걸린다. 전자는 반응을 요구하고, 후자는 생각을 남긴다. 전자는 지금 당장 내 편과 네 편을 나누게 하지만, 후자는 내가 왜 그렇게 빨리 편을 나누고 싶어 하는지를 묻는다.
팟캐스트도 있고, 유튜브도 있다. 찾으면 있다. 그러나 찾아야만 들을 수 있는 것과, 흘러나오는 것은 다르다. 전자는 선택이고, 후자는 환경이다. 선택은 의지가 있는 사람의 몫이지만, 환경은 의지가 약한 사람까지 조금씩 바꾼다.
한국의 공영 라디오가 일주일에 한 번만이라도 철학자와 시인을 불러 느리게 이야기를 나누면 어떨까. 한국 철학만이 아니라 세계의 철학으로, 한국 문학만이 아니라 세계의 문학으로. 아침 뉴스 사이에 니체가 끼어들고, 출근길에 보르헤스가 흘러나오는 라디오. 점심 무렵에는 장자가 지나가고, 퇴근길에는 버지니아 울프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거는 라디오.
공영 방송의 존재 이유는 시장이 하지 않는 일을 하는 것이다. 시장은 자극을 판다. 공영은 사유를 나눠야 한다.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그리 대단한 일인가. 프랑스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하고 있는 일이다.
분노는 방향을 알려준다. 사유는 속도를 조절한다.
나는 오늘 아침 어느 의원이 무슨 말을 했는지 몰랐다. 대신 돈키호테가 왜 풍차를 향해 달려갔는지를 조금 더 생각했다. 풍차가 거인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때로 인간은 틀린 대상을 향해서라도 달려가야 자기 삶의 모양을 얻는다. 어느 쪽이 더 유용한지는 모른다. 다만 어느 쪽이 더 오래 남는지는 안다.
느린 목소리는 늦게 도착한다. 그래서 더 오래 머문다.
제길, 빠져나가려면 꽤 오래 걸리겠군.
8시 짧은 뉴스에 이어 시사 프로그램이 다시 시작된다. 여야 의원이 나와 오늘의 이슈를 토론한단다. 아침부터.
말이 좋아 토론이지, 자기 입장의 고함이다. 질문은 짧고, 답은 길고, 반박은 더 길다. 진행자는 중재하는 척하고, 출연자는 듣는 척한다. 각자 준비해온 말만을 꺼내놓는다.
나는 그런 목소리 속에서 핸들을 꽉 잡는다. 이 방송을 듣고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켜놓은 것이다.
시사 라디오는 부지런하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정치 뉴스를 쉬지 않고 나른다. 누가 누구를 공격했고, 누가 무슨 말을 번복했으며, 어느 쪽이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 취해야 하는지.
정보량은 꽤 많다. 그런데 하루가 끝날 무렵, 무언가를 많이 알게 됐다는 느낌보다 무언가에 많이 시달렸다는 기분이 든다. 분노는 쌓였고, 피로는 늘었는데, 달라진 것은 없다.
정치 뉴스가 나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시민은 알아야 하고, 권력은 감시되어야 한다. 말의 싸움도 때로는 필요하다.
다만 그것이 하루의 첫 번째 목소리여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눈을 뜨자마자 분노를 공급받고, 출근길부터 진영의 말투를 익히며, 커피 한 잔 다 마시지 못한 몸으로 국가의 운명을 걱정하는 일이 과연 건강한 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프랑스에는 '프랑스 앵테르(France Inter)'라는 공영 라디오가 있다. 뉴스와 시사를 다루는 대중 라디오이지만, 여름이면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한 명의 고전 작가나 한 편의 고전을 붙잡고 한 계절을 건넌다. 몽테뉴의 질문을 되묻고, 돈키호테와 산초의 대화를 다시 펼친다. 보들레르, 파스칼, 프루스트, 호메로스, 빅토르 위고 같은 이름들이 아침 공기 속으로 퍼져나간다.
목소리는 낮고 느리다. 결론을 서두르지 않는다. 오늘 반드시 알아야 할 쟁점도 없고, 내일 뒤집힐 속보도 없다. 대신 오래된 문장을 다시 읽는다.
사람은 왜 허영에 빠지는가.
우리는 왜 모험을 떠나는가.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
실패한 인간은 정말 실패한 인간인가.
당신의 분노는 당신의 것인가, 아니면 누군가 아침마다 주입해준 것인가.
방송은 책으로도 나왔다. 매년 한 편씩 쌓였다. '함께 하는 여름' 시리즈다. 라디오가 흘려보낸 말이 책이 되고, 여름의 목소리가 독서 목록이 된다.
TBS는 한때 사라질 위기까지 갔다. 옳고 그름을 따질 생각은 없다. 누군가는 지나치게 편향됐다고, 누군가는 불편한 방송을 압박하려 했다고 말할 것이다. 둘 다 어느 정도는 근거를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논쟁 너머에서 한 가지는 생각해볼 만하다.
살아 있을 때도 시사였고, 사라질 뻔할 때도 시사가 문제였다. 철학자를 불러 한 시간을 내준 적이 얼마나 있었는가. 시인이 나와 자기 시를 읽어준 적이 얼마나 있었는가. 공영이라는 이름을 달고도, 공적 사유를 위한 시간은 얼마나 있었는가.
공영 라디오가 정치의 도구가 되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우리는 그 일에는 자주 분노한다. 그러나 공영이 현실 정치만을 말하는, 그 빈곤에는 좀처럼 분노하지 않는다. 앞엣것은 권력의 문제고, 뒤엣것은 상상력의 문제다. 우리는 권력의 오용은 쉽게 알아채면서, 상상력의 부재는 너무 쉽게 당연하게 여긴다.
들린다는 것과 듣는다는 것은 다르다. 시사 라디오는 들린다. 철학 라디오는 듣게 한다. 전자는 귀에 닿고, 후자는 어딘가에 걸린다. 전자는 반응을 요구하고, 후자는 생각을 남긴다. 전자는 지금 당장 내 편과 네 편을 나누게 하지만, 후자는 내가 왜 그렇게 빨리 편을 나누고 싶어 하는지를 묻는다.
팟캐스트도 있고, 유튜브도 있다. 찾으면 있다. 그러나 찾아야만 들을 수 있는 것과, 흘러나오는 것은 다르다. 전자는 선택이고, 후자는 환경이다. 선택은 의지가 있는 사람의 몫이지만, 환경은 의지가 약한 사람까지 조금씩 바꾼다.
한국의 공영 라디오가 일주일에 한 번만이라도 철학자와 시인을 불러 느리게 이야기를 나누면 어떨까. 한국 철학만이 아니라 세계의 철학으로, 한국 문학만이 아니라 세계의 문학으로. 아침 뉴스 사이에 니체가 끼어들고, 출근길에 보르헤스가 흘러나오는 라디오. 점심 무렵에는 장자가 지나가고, 퇴근길에는 버지니아 울프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거는 라디오.
공영 방송의 존재 이유는 시장이 하지 않는 일을 하는 것이다. 시장은 자극을 판다. 공영은 사유를 나눠야 한다.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그리 대단한 일인가. 프랑스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하고 있는 일이다.
분노는 방향을 알려준다. 사유는 속도를 조절한다.
나는 오늘 아침 어느 의원이 무슨 말을 했는지 몰랐다. 대신 돈키호테가 왜 풍차를 향해 달려갔는지를 조금 더 생각했다. 풍차가 거인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때로 인간은 틀린 대상을 향해서라도 달려가야 자기 삶의 모양을 얻는다. 어느 쪽이 더 유용한지는 모른다. 다만 어느 쪽이 더 오래 남는지는 안다.
느린 목소리는 늦게 도착한다. 그래서 더 오래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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