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광장/채인택]군인에게 목숨 바치라고 명령할 수 있을까?
육군 핵심가치 위국헌신·책임완수·상호존중
'위국헌신 군인본분' 유묵 안중근 정신이 기원
육사 1·2기, 생도 신분 6·25전쟁 투입돼 희생
육사 교정 태릉 화랑대, 국군 탄생한 호국성지
소통, 숙의 없는 일방적 사관학교 통합은 독선
군인에 희생·헌신 요구하려면 존경·존중부터
채인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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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1907년 7월 31일 순종이 일제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강요로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한 지 3년쯤 지난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로 망했다. 망군은 망국의 전초였던 셈이다. 그 뒤 군대도, 나라도 없이 지내던 우리는 1946년 1월 15일 국군 모체인 국방경비대를 지금의 육군사관학교 자리에서 창설하면서 다시 정식 군대를 보유하게 됐다.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보다 앞선다.
군사학교는 군보다 먼저 창설됐다. 1945년 12월 5일 군사영어학교로 시작해 이듬해 5월 1일 남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6월 15일 조선경비사관학교를 거쳐 1948년 9월 5일 비로소 육군사관학교라는 이름으로 정착했다. 이렇게 탄생한 국군 중 육군은 '위국헌신·책임완수·상호존중' 등 3대 요소를 핵심 가치로 삼는다. 육사 생도들은 여기에 화랑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교훈인 '지(智)·인(仁)·용(勇)'을 더한 정신교육을 받으며 군인정신과 리더십을 배운다.
이 핵심 가치는 사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1879~1910)의 군인정신에서 나왔다. 안 의사가 남긴 유묵 등에 나타난 군인 사상이 육군 3대 요소와 완전히 일치하기 때문이다. 영남대 군사학과 이영한 겸임교수가 안 의사의 유묵과 자서전인『안응칠 역사』, 미완성 저서인 『동양평화론』, 당시 공판기록과 매일신보 보도 등을 바탕으로 그의 군인사상을 분석한 결과다. 그 내용은 국방부 산하 국방정신전력원이 발행하는 학술지 『정신전력연구』에 2024년 게재된 '안중근의 가치관과 군인정신에 대한 연구'라는 논문에 실렸다. 안 의사의 사상은 군인정신의 6대 요소인 명예·충성심·용기·필승신념·임전무퇴·애국애민' 중 특히 명예·용기·애국애민이 두드러졌으며 그 근원에는 '정의'가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이는 2014년 3월 서울 만리동의 보덕사에서 만나서 들은 삼중 스님(1942~2024년)의 증언과 일치한다. 40년 이상 사형수 구명 및 교화 활동과 더불어 안중근 의사 숭모 사업에 헌신한 삼중 스님은 안 의사가 남긴 57점 이상의 유묵에 읽힌 사연을 소개하면서 안 의사가 생전에 특히 군인정신을 강조했다는 사실을 들려줬다.
삼중 스님에 따르면 안 의사는 항일 의병 운동에 참여한 자신을 '대한의군 참모중장'이라고 소개하는 등 자신을 나라를 헌신하는 군인이라고 여겼다.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 사살을 군인으로서 할 일을 한 것으로 여겼다. 1910년 2월 14일 사형을 선고받은 뒤 같은 해 3월 26일 뤼순(旅順) 감옥에서 처형된 안 의사가 집행 직전 일본 감시병인 지바 도시치(千葉十七)에게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침은 군인의 본분이다)'이라는 휘호를 써준 것은 이런 신념을 반영한다. 뤼순 법원 취조 담당인 야스오카 세이시로(安岡靜四郞) 검찰관에게 '국가안위 노심초사(國家安危勞心焦思•국가의 안위를 위하여 마음을 쓰며 애를 태운다)'라는 글을 써준 것도 마찬가지다. 일본으로 건너갔던 두 유묵은 모두 한국으로 돌아와 국립민속박물관 파주관에 보관되고 있다.
안 의사가 유묵으로 남긴 '위국헌신 군인본분'과 '국가안위 노심초사'를 실천한 대한민국 군인으로 누가 있을까 생각하다 2010년 6월에 만났던 황규만(1931~2020) 예비역 준장을 떠올렸다. 황 장군은 만 18살 때인 1949년 7월 15일 2년 과정의 육군사관학교에 생도 1기(나중에 육사 10기가 됨)로 태릉 육사에 입교했다. 1기생은 1950년 7월 14일로 예정된 졸업 및 임관식을 불과 20일을 앞두고 6·25전쟁을 만났다. 황 장군은 "당시 모든 생도가 한 치 망설임도 없이 총을 들고 나섰다"고 증언했다. 생도들은 북한 남침 다음 날인 6월 26일 실전에 투입돼 포천지구에서 적과 교전했다. 1기생 262명 중 65명은 군번도 없이 생도 신분으로 전사했다. 1기는 6·25전쟁을 통틀어 113명이 희생됐다.
1950년 6월 1일 입교한 생도 2기는 기초교육도 마치지 못하고 3발의 소총 영점사격만 끝낸 상태에서 전투에 긴급 투입됐다. 포천 및 의정부 지구 등에서 북한군 남침을 저지하다 60여 명이 전사했다. 장교 단기 양성과정인 육군 갑종간부후보생 1기도 1950년 1월 31일 경기도 시흥 육군보병학교에 146명이 입교했는데, 전투에 나서 30명이 전사했다. 이처럼 사관생도들이 전투에 참여한 것은 유례가 드물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전인 1945년 4~5월 베를린 전투에 독일 장교 후보생들이 투입된 정도다. 사관생도는 과학기술자와 더불어 국가와 공동체의 미래를 위해 마지막까지 보호하고 지켜야 할 대상이기 때문이다.
많은 희생자를 낸 생도들은 포천에서 태릉-한강-용인 김량장-수원을 거쳐 대전에 재집결했다. 그해 7월 10일 충남도청 광장에서 서로 마주 보며 반창고로 만든 계급장을 달아주는 것으로 소위 임관식을 대신했다. 화랑대로 불리는 육사 교내에는 1959년 1기 생도의 희생을 기리는 불멸탑이 서 있어 피로 시작한 사관학교의 호국 전통을 후배들에게 교육하고 있다. 베트남전 참전을 앞두고 훈련 중 누군가가 실수로 떨어뜨린 수류탄을 온몸으로 덮쳐 부하들을 구한 강재구 소령을 기리는 재구탑도 서 있다. 생도 단체 사진에 단골로 등장하는 장소다. 육사에는 그를 기리는 재구생도대도 있다.
육사가 자리 잡은 화랑대는 단순한 교정이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하게 80년 전인 1946년 1월 15일 국군 모체인 국방경비대가 창설된 곳이자, 군번도 없이 생도 신분으로 전사한 생도 1기 65명이 내 나라를 지키는 군인의 꿈을 키우던 호국 성지다. 사관생도들은 나라와 부하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 선배들을 길러낸 호국 성지에서 교육받으면서 헌신과 희생의 군인정신을 기른다. 과거 일부의 일탈은 이러한 전통을 해치는 오점일 뿐이다. 일부의 오점을 바탕으로 군인과 사관학교 전체를 '개혁 대상'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정의로운 일이 아니다.
문제는 그런 장소를 사실상 아파트 건설 부지로 내주고 육사를 해군사관학교 및 공군사관학교와 통합해 대전으로 옮겨가는 방안이 정부에 의해 일사천리로 추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군인은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집단이고, 더구나 민주사회에선 국민이 선출한 정부의 명령에 당연히 따라야 한다.
하지만 간과한 게 하나 있다. 군인은 죽음을 명령받을 수 있는 특수 집단이지만 그만큼 이에 수반되는 명예와 자부심이 절대적이라는 사실이다. 민주사회에서 선출된 권력인 군 통수권자는 군인에게 죽음을 명령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 명령은 합리적이어야 하고 군인에 대한 존경과 존중이 바탕에 깔려야 하며 어떠한 경우에도 명예와 자부심을 지켜줘야 한다.
최근 사관학교 통합과 이전을 추진하는 정부의 속도전을 보면 존중과 존경 대신 독선과 일방통행만 보인다는 지적이 나온다. 문민 우위의 원칙에 따라 선출직 정치인은 군인을 지휘해야 하지만 존경과 예우 없는 독단적인 명령과 지시는 역사에 새로운 오점이 될 수 있다.
사관학교 통폐합 추진이든, 장교·부사관 인력 충원이든 국방 인력 정책은 군인을 존중하는 자세에서 시작해야 마땅하다. 더 큰 문제는 국방부가 예비역과 퇴역군인을 포함한 군 출신이나 일반 국민과의 충분한 상호 소통도, 사회적인 숙의도 없이 일을 진행해왔다는 점이다. 특히 군과 군사 문제를 가장 잘 아는 군인 세계와는 소통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 흔한 공청회, 세미나도, 연구용역도 보기 힘들었다는 사실이 이를 잘 말해준다.
모든 개혁은 개혁 당사자나 일반 국민과 쌍방향으로 충분히 소통하면서 진행할 때 비로소 명분과 공정성을 확보하면서 힘을 얻을 수 있다. 일방적인 개혁은 독선의 또 다른 이름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군인들에게 유사시 목숨을 바치라고 명령하려면 국가와 공동체가 그들의 명예와 자부심을 최고의 예우로 철저히 지켜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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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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