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푸(曲阜). 공자의 고향이다. 중국 산둥성의 수도, 지난(濟南)에서 서남쪽으로 135km 떨어진 곳으로 자동차로 1시간30분 정도 달리면 도착한다. 공자가 죽은 지 2500년이 지난 지금도 이곳에서는 공자의 향기를 진하게 느낄 수 있다. 
 
취푸에는 공자와 관련된 3개의 유명한 유적지, 싼콩(三孔)이 있다. 바로 공자의 사당인 콩먀오(孔廟), 공자 후손들이 지냈던 콩푸(孔府), 그리고 공자 묘를 비롯한 공씨 가족묘역인 콩린(孔林)이 그것이다.
 

 
◆공자의 경제학과 문화학
 
싼콩을 찾는 사람은 1년에 400만명이며 1인당 150위안(2만7000원)인 싼콩 입장료로 벌어들이는 수입만 연간 6억위안이다. 숙박이나 관광마차 등 관광수입을 합하면 18억위안(3240억원)이나 된다고 한다. 웬만한 자치단체 연간 예산규모다.
 
취푸시 전체인구는 64만명. 싼콩을 포함한 시가지 인구는 15만명 정도다. 이 가운데 5분의 1인 3만명 정도가 공자의 후손인 공(孔)씨다. 공자와 피를 나눈 공씨는 물론 중국인 후손들도 공자 덕분에 의식주를 해결하고 있는 셈이다. 바로 공자의 경제학이다.
 
게다가 취푸인들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소크라테스, 예수, 부처와 함께 세계 4대 성인 중의 한명으로 추앙받는 공자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취푸시내에 들어서면 공자가 제자들과 함께 열국(列國)을 주유하던 모습을 재현해 놓은 조각상을 만나게 된다. 호텔이나 식당에 가면 '벗이 멀리서 찾아오니 즐겁지 아니한가'(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라는 글을 볼 수 있다. 공자의 가르침을 집대성한 <논어>(論語)의 첫머리에 나오는 '군자3락'의 두번째 구절이다. 공자의 문화학이라고 할까.
 
싼콩에 들어가면 공자의 향기를 더욱 물씬 느낄 수 있다. 공자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당인 콩먀오를 가장 먼저 가게 된다. 이곳은 공자가 서거한 이듬해인 기원전 478년, 그러니까 지금부터 2490년 전에 공자의 제자들이 만들어 그에게 제사를 지내기 시작한 곳이다. 초기엔 넓이가 3칸밖에 안되는 조그만 공간이었다. 열국을 돌아다니며 왕도정치를 설파했지만, 춘추전국시대의 피비린내 나는 현실 속에서 외면 받았던 그의 삶처럼 죽은 뒤의 모습도 초라했다. 진시황이 통일한 뒤 유학관련 서적을 불태우고 그의 제자들을 숙청한 분서갱유(焚書坑儒) 때는 숨소리도 내기 어려웠다.
 
하지만 류방(劉邦)의 한(漢)나라가 유교를 중시하면서 공자에 대한 대접이 180도 바뀌었다. 왕조가 바뀔 때마다 확장돼 지금은 면적이 200무(4만평), 남북거리 1km의 공간에 17개의 비각과 466칸의 공간이 있다.
 
비록 황제가 살던 꾸꿍(古宮: 紫禁城, 22만2220평)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콩먀오는 공자 사당답게 문과 건물 이름이 예사롭지 않다. 콩먀오 대문 이름은 '금성옥진방'(金聲玉振坊). 금성은 아악(雅樂)을 연주할 때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이고, 옥진은 끝을 알리는 소리다. 공자의 사상은 옛 성현의 사상을 모두 집대성해 처음과 끝을 다 갖고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금성옥진방을 지나 몇개의 문을 지나면 대성전(大成殿)에 다다른다. 대성이란 맹자가 그의 스승인 공자에 대해 "학문을 집대성한 분"이라고 평가한 데서 따온 말. 이곳에는 공자상(像)이 모셔져 있다. 대성전은 높이 24.8m, 폭 45.78m, 깊이 24.89m이며 지붕엔 황제만 쓸 수 있는 황색기와를 올렸다. 베이징 꾸꿍에 있는 태화전, 태산에 있는 따이먀오(大廟)의 천황전과 함께 동방의 3대 전(殿)으로 불릴 만큼 규모와 장식이 남다르다.
 
대성전 앞에는 싱탄(杏亶)이 있다. 공자가 제자들에게 자신의 사상에 대해 강의하던 곳이다. 제자들을 가르치던 강의실 앞에 은행나무를 심었기 때문에 싱탄이라고 부른다.
 
대성전을 돌아 나오면 콩푸로 연결된다. 콩푸의 정식 명칭은 '얜셩꽁푸'(衍聖公府). 콩먀오 동쪽에 있는 공자 적장손이 살면서 공씨촌을 다스리던 관아다. 송나라 때 얜셩꽁을 봉했고 명나라 태조 때 얜셩꽁푸를 만들었다. 현재 7.4ha(2만2200평)의 넓이에 480여칸의 건물과 대청 및 방이 남아 있다.
 
장졔스(蔣介石) 총통의 국민당 정부시대까지도 얜셩꽁이 이곳에 거주했지만, 국민당 정부가 마오저둥(毛澤東)의 공산당 정부에 밀려 타이완으로 쫓겨날 때 공자의 적장손도 함께 이주했다고 한다. 따라서 이곳은 사람이 살지 않는 유적으로만 남아 있다.
 
 

 
◆후손에게 삶의 좌표를 주는 공자의 영향력
 
콩푸에서 인상 깊은 곳은 뒤뜰에 있는 '오군자백'(五君子柏). '오백포괴'(五柏抱槐)라고도 불리는 오군자백은 말 그대로 5그루의 측백나무가 1그루의 홰나무를 가운데 품고 있는 것이다. 나이가 400년 정도 된 것으로 추정되는 측백나무 한 가운데 홰나무가 함께 자라는 모습은 신비롭다 못해 괴이하기까지 하다. 
 
또 하나 몸서리치게 가슴에 와 닿은 곳은 잘못한 아이를 벌주던 곳. 마치 빨래판처럼 돼 있는 돌 위에 무릎 꿇게 해서 잘못을 뉘우치고 두번 다시 똑같은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도록 한(그곳에 단 10초도 무릎 꿇고 앉아있기 어려울 듯하다) 혹독한 교육방법에 성적이 떨어졌다거나, 원하는 대학에 입학하지 못했다거나, 고시에 합격하지 못했다고 해서 자살하는 현대의 나약한 젊은이들의 모습이 투영된다.
 
오군자백을 지나면 공자의 무덤인 콩린(孔林)까지 마차를 타고 이동한다. 약 2km 정도여서 산책 삼아 걸어가도 되지만 일정이 바쁘다는 이유로 100위안(1만8000원)이나 하는 마차를 탄다(그래도 말이 끄는 수레인 마차를 처음 타본다는 느낌은 생생하다).
 
콩린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됐고 면적도 가장 넓은 공자 가족 묘역. 2490년의 역사에 면적이 2㎢나 된다. 이곳에는 공자의 묘는 물론 그의 손자인 자사(子思: <중용>의 저자)의 묘 등 공씨 집안의 10만여기에 이르는 묘가 있다. 또 공자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자공(子貢)이 옆에서 움막을 짓고 6년 동안이나 공자의 묘를 지킨 유적지도 남아 있다.
 
공자는 진시황으로부터 분서갱유를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또 마오저둥에게도 '콩라오알'(孔老兒: 공씨 집안의 둘째 아들)이라며 비하를 당했다. 하지만 한나라를 세운 류방(劉邦)은 "진시황이 정의로 다스렸다면 당신이 황제될 기회가 있었겠느냐?"는 루구(陸賈)의 충고를 받아들여 공자를 정식 지도이념으로 삼았다. 마오저둥의 뒤를 이은 덩샤오핑(鄧小平)과 후진타오(胡錦濤)도 샤오캉(小康)사회와 허셰(和諧) 및 따퉁(大同)사회를 내세우며 공자를 복권시켰다.
 
살아서 고생한 공자는 죽어서 오랫동안 이름을 남기는 정치경제학을 실천하고 있다. 후손은 물론 중국인들에게 삶의 좌표를 주는 그는 앞으로도 인류역사가 이어질 때까지 계속 영향을 발휘하는 신통력을 보여줄 것이다. 인생은 짧고 사상은 긴 것이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262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