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여행마저 피곤할 때가 있다. 일주일 동안 지친 몸을 힘든 어드벤처 여행에 쓰려고 하니, 엄두가 나지 않는다면? 이럴 땐 잘 먹고, 잘 놀다 오는 여행을 택해 보자. 남원은 지친 심신을 달래주는, 스트레스 제로의 여행지이다. 이곳에선 편안한 산책과 넉넉한 포만감과 향기로운 티타임이 기다리고 있다.
◆평지에 자리잡은 천년고찰, 실상사
‘사찰’하면 산이다. 우리 모두가 공감하는, 이른바 암묵적 합의. 절벽에 자리잡은 암좌나 숲으로 둘러쌓인 대웅전이 우리에겐 익숙하다. 그래서 도시 한복판에 있거나 평지에 있는 사찰을 만나면 그것만으로도 이색적이다. 가끔은 평지에 있어줘서 고마운 사찰도 있으니 지금 말하고자 하는 실상사이다.
찻길에서 불과 200m만 걸어 들어가면 만날 수 있는 실상사는 짧은 진입로마저 다채롭다. 만수천을 건너는 해탈교, 다리를 건너자마자 왠지 모를 코믹한 모습으로 맞이하는 석장승, 잠시 지리산 자락의 벌판이 펼쳐지는가 싶지만 곧바로 등장하는 천왕문. 벌써 목적지에 다 왔다. 아니, 그 흔한 일주문도 없으니 이야말로 거두절미이다. 마치 이웃집처럼 자리잡은 실상사는 이렇게 편안하게 여행자를 맞이한다.
입구에 들어서면 커다란 기와탑이 눈길을 끈다. 실상사 발굴 도중 출토된 기와라고 하는데 이것들을 잘 모아서 탑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것이 ‘실상사’하면 떠오르는 하나의 형상이 됐다. 평지에 자리잡아 위엄을 과시하지 않는 이 사찰과 넓고 펑퍼짐하게 만들어진 기와탑이 묘하게 잘 어울린다. 기와탑 뿐 아니라 실상사의 모든 것이 고압적이지 않고 평화롭다. 지금은 터만 남아 있는 목탑도 그런 의미에서 이 분위기에 한 몫을 한다. 만약 이 전각이 소실되지 않고 남아 있었다면 상당한 규모를 자랑했을 텐데, 기둥자리만 남아 세월의 무상함을 말하고 있다.
눈 덮인 실상사가 푸근한 느낌이 더한 이유는 이곳이 평지사찰이어서가 아닐까? 솜이불을 덮은 사찰은 굳이 기울인 사면으로 눈을 내려보내지 않고 봄기운이 감돌 때 자연스럽게 그 옷을 벗을 것이다.
◆1%에게만 허락된 최고급 흑돼지
이제 충전의 시간이다. 처음부터 먹고 놀기를 계획했으니 이왕이면 최고의 것으로 에너지를 얻자. 지리산 고원 흑돼지는 그런 의미에서 적격이다. 사실, 우리나라의 돼지는 다 흑돼지였단다. 그런데 이 돼지들이 맛은 좋지만 생육이 느리고, 크기가 작았다. 먹고 살기 힘들었던 시기,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점차 생산성 높고 아무거나 잘 먹는 백돼지로 바뀐 것이라고 한다. 흑돼지 하면 제주도만 생각했는데, 지리산 그것도 해발 500m 청정지역에서 나온다는 것이 이외다. 게다가 이들은 국내 돼지 생산량의 1%가 조금 넘는 양으로, 먹는 사람 입장에선 1%에게만 허락되는 귀한 음식이다.
우선 고기 본연의 맛을 음미할 수 있는 생고기부터. 삼겹살, 항정살, 가브리살의 흑돼지 3종 세트를 먹어보자. 두툼하게 썰어 나온 생고기만 봐도 찰기가 느껴진다. 불에 올려 ‘지직…!’ 기대감으로 조바심이 들 때쯤 한번 뒤집어 주고, 이미 눈은 점 찍어놓은 고기 한 점에 시선 고정이다. 드디어 입 속으로! 육즙이 부드럽게 퍼지는 게 고기의 단맛이 유별나다. 돼지고기가 잘못 구우면 뻣뻣해 지는데 이 고기는 촉촉한 맛이 특별해서 크게 ‘고기 잘 굽는 기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이렇게 맛있는 흑돼지를 남원까지 와야 먹을 수 있다고 한다. 이게 바로 1%의 생산량이 주는 희소성이지….
평소 맛보기 힘든 흑돈이니 다른 조리법으로도 맛을 보자. 바비큐는 미리 익혀서 나오는데, 10시간 동안 구워내어 정성이 돋보인다. 고기 한 점을 능이나물에 돌돌 말아 입에 넣으면, 기름 쏙 뺀 고기의 쫀득하게 씹히는 맛과 함께 고소한 육즙, 은은한 숯향이 그만이다. 함께 나오는 야채와 김치는 돼지고기의 단백질과 지방의 분해를 돕고 다양하게 입안의 행복을 선물한다. 이미 재료 본연의 맛으로 승부를 보았는데, 고추장 양념 볶음은 오죽할까. 야채와 어우러진 최고급 흑돈은 어떤 양념에도 굴하지 않고 최고급 돼지고기의 맛을 뽐낸다. 오랜만에 몸에 좋은 일을 하는 날이다.
◆허브밸리에서 오감 후식
오랜만에 기분좋게 속을 채웠다. ‘맛있는 음식에 절제가 부족했구나…’ 생각이 든다면 허브밸리로 이동하자. 허브식물원을 한발자국 움직일 때마다 상큼한 향이 코를 간지럽힌다. 로즈마리, 라벤더, 레몬그라스, 레몬밤, 자스민, 캐모마일 등 그 향만으로도 소화가 다 되는 것 같다. 옷에 밴 고기 구운 냄새도 빼고, 허브 꽃을 보며 눈도 리프레시 하자.
가벼운 산책 후엔 카페테리아로 자리를 옮겨 차 한잔을 마시자. 허브티 한잔이 1000원. 순전히 여행자를 위한 서비스이다. 소파에 몸을 기대고 호젓하게 즐기는 이 시간이 바로 여행이 주는 여유일 것이다. 카페테리아가 속해 있는 관리동에는 지리산 자생식물전시관이 있는데, 편안하게 볼거리를 제공한다. 지리산에 자생하는 식물 429점이 압화로 전시돼 있어 아이와 함께 왔다면 교육적으로도 의미가 있다.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불빛을 받고 있는 마른 꽃잎들이 단조롭지만 팬시한 느낌을 줘 여성들에게 인기가 높다.
겨울엔 들판에 자생식물을 볼 수 없는 대신 특별한 축제가 열린다. ‘지리산 바래봉 눈꽃축제’가 그것이다. 사실 축제가 아니더라도 바래봉의 설경은 유난하다. 철쭉 군락지역으로, 봄이면 화려하게 변신하는 이곳에 겨울에는 꽃 대신 눈이 내려 앉는다. 특별히 지리산 이 지역이 겨울이면 적설량이 많다고 한다.
철쭉은 키가 크지 않고 가지가 얇은 관목이라 온 산에 퍼진 눈꽃이 아기자기하고 평온한 느낌이다. 멀리 보이는 바래봉은 눈꽃인데 허브밸리에서는 재미있는 캐릭터와 함께 즐길 거리가 다양하다. 먹고 쉬려고 떠나온 여행이지만 점심이 과했다 싶다면 기대치 않았던 축제의 장이 오히려 반가울 것이다. 특히 120m의 눈썰매장은 적당한 비탈과 오르기에 적당한 거리로 아이들과 함께 온 여행자들에게 인기가 좋다. 이 외에도 눈썰매, 얼음썰매, 빙벽체험, 눈사람, 눈조각 전시, 바래봉 등산대회, 연날리기, 눈싸움 등이 있으니 하나쯤 참여해 보는 것도 좋겠다.
오랜만에 먹고 쉬는 평탄한 여행도 그럴 듯 했다. 풍만하게 채운 하루에 감사하며 이제는 돌아갈 시간이다. 또 멋진 여행을 기대하며….
[여행정보]
<실상사 가는 방법>
승용차
서울 - 경부고속도로 - 통영대전중부고속도로 비룡분기점 - 88올림픽고속도로 함양분기점 - 인월장터로 - 배암등사거리에서 ‘함양, 지리산 국립공원’ 방면으로 좌회전 - 황산로 - 신촌교차로에서 ‘지리산국립공원, 인월’ 방면으로 우회전 - 천왕봉로 - 대정삼거리에서 ‘마천,실상사’ 방면으로 좌측 - 천왕봉로 - 마천면사무소 끼고 우회전 - 실상사 입구에서 도보 이동
대중교통
서울 센트럴시티터미널 - 남원고속버스터미널 - 도통주민센터 정류장까지 이동 - 141번 버스 - 산내정류장 하차
<실상사에서 지리산 고원 흑돈 유통센터 가는 방법>
승용차
천왕봉로 - 배암등사거리에서 ‘지리산 IC’ 방면으로 우회전 - 인월장터로 1.81km 이동
대중교통
실상사 정류장에서 141번 버스 - 군화동 정류장 하차 - 132번 버스 - 내인마을 정류장 하차
<고원 흑돈 유통터에서 허브밸리 가는 방법>
승용차
인월장터로 - 배암등사거리에서 ‘국악의 성지, 남원’ 방면으로 우회전 - 황산로 - 번암삼거리에서 좌회전 - 성로 - ‘바래봉, 지리산 허브밸리, 가축유전자원시험장’ 방면으로 좌회전 - 운성로 - 바래봉길
대중교통
내인마을 정류장에서 133번 버스 - 우체국앞 정류장에서 하차
<실상사>
http://www.silsangsa.or.kr
템플스테이, 학림, 공연 등 여러가지 이벤트 뿐 아니라 생명살림 연대 인드라망, 대안학교인 실상사작은학교 등 여러가지 공동체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지리산 남원 흑돈>
고원흑돈 고객센터 063-625-3663 / 전북 남원시 아양면 인풍리 521
삼겹살 1만2000원 (1인분) / 바비큐 3만~5만원 / 고추장불고기 1만원 (1인분)
흑도니 명품세트 5만원 / 흑도니 한마리 4만6000원 / 흑도니 반마리 2만4000원
인터넷 구입처 : 행복한 아웃도어 푸드 http://www.fortaste.co.kr
<허브밸리와 지리산 남원 바래봉 눈꽃축제>
허브밸리 : 오전 9시~ 오후 6시
전북 남원시 운봉읍 바래봉길 214 / 063-620-4892
관리동 카페테리아 허브티 1000원
눈썰매장 : 오전 10시~오후 4시 / 입장료 6000원 (어른·어린이 동일)
지리산 남원 바래봉 눈꽃축제
http://wingbus.naver.com/spotDetail.nhn?spotId=KRF2779
기간 : 2012. 12. 24 ~2013. 2. 11
문의 : 063-620-3818(남원시청), 063-625-7864(허브밸리)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265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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