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사 4년차를 맞은 30대 직장인 이승우 대리. 그의 수면시간은 5시간에 불과하다. 3년째 5시간만 잤더니 이제 습관이 됐다. 언제 순서가 돌아올지 모르는 해외근무에 대비해 3년 전부터 영어학원을 다니고 있어서다. 아이들과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은 주말이 전부다.
영어수업을 마치고 사무실에 도착한 시각은 오전 8시45분. 출근시간인 9시보다 15분 빨리 도착했지만 이씨의 발걸음은 분주하다. "부장님이 더 먼저 오셨을 거 같아서요."
서둘러 자리에 앉은 이씨는 컴퓨터를 켜자마자 메신저 알림 세례를 받는다. "전날 야근자들이 보낸 메시지예요. 보통 십여개가 넘는데 여러 요구사항이 대부분이죠. 메신저 알림소리로 스트레스 받으면서 하루를 시작합니다."
너털웃음을 보이는 이씨. 그는 IT회사에서 근무한다. 자신의 업무는 본사에서 파견 나와 기업의 시스템을 교체하는 작업이다. 파견 나온 회사와 계약조건에 따라 시스템 오픈일이 정해지기 때문에 기한에 맞추려면 야근이 많을 수밖에 없다.
이씨 역시 전날 밤 9시가 넘어서야 겨우 퇴근할 수 있었다. 자신보다 늦게 퇴근하는 직원들도 부지기수. 전날 야근자들이 보내놓은 메시지에 적힌 대로 일을 처리하다보면 어느덧 반나절이 훌쩍 지나간다.
점심시간은 보통 11시50분부터 시작한다. 주말과 점심시간은 왜 이리 빨리 가는지. 직원들과 식사한 후 커피 한잔을 들고 산책하며 숨좀 돌리다 보면 어느새 1시다. 점심식사를 포기한 채 책상에 엎어져 낮잠을 청하는 날도 많다.
오후 근무는 회의로 시작한다. 팀 회의를 통해 일의 진척상황을 점검하고 나면 타부서 회의가 이어진다. 여기서는 이씨의 팀과 다른 팀이 서로 일을 분배한다. 따라서 회의를 하다보면 보이지 않는 팀간 알력 다툼이 벌어지기도 하는데, 소위 일을 '떠넘기기 위한 회의'가 될 때가 대부분이다. 타부서 회의까지 마치면 어느덧 5시. 그제서야 이씨 본인의 일을 할 여유가 생긴다.
"이러니까 야근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이 일 저 일로 불려 다니다보면 정작 제 일을 할 시간이 없는 거죠. 대한민국 직장인들 대부분이 아마 저 같을 거예요."
이 대리의 목소리는 오전보다 고조돼 있었다. 이씨의 업무인 시스템 프로그래밍은 한두시간 내에 끝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퇴근시간인 7시 무렵에는 '윗분'들의 눈치 보는 게 일상이다. '오늘은 일찍 가게 될까?'기대하다가도 "이 대리 밥 먹고 옵시다"라는 소리에 맥이 빠진다. '저녁 먹으러 가자'는 얘기는 곧 '야근하고 가라'는 말로 통하기 때문이다. 이씨에게 '칼퇴근'은 먼나라 얘기나 마찬가지다.
"상사가 워커홀릭(일중독자)에 CCTV맨이에요. 직원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한다는 뜻이죠. 저희 또래 중 누가 일에만 매진해서 삽니까?"
신규프로젝트에 투입된 이씨는 지난 주말에 특근을 했다. 주말에도 출근하는 분위기에 잠깐 '반기를 들어볼까' 싶었지만 현실은 '일개미'일 뿐이다. 이달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지난달은 한달 내내 토요일과 일요일에 출근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업무강도가 점점 세지는 가장 큰 이유는 일할 직원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IT회사에서 한 기업의 시스템 교체작업을 맡으려면 치열한 입찰경쟁에서 이겨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결국 낮은 가격을 제시해야 하는데, 회사로서는 인건비를 줄여 가격을 맞추려고 하는 것이다. 최소인력으로 최대효과를 보려고 하니 직원들은 야근과 주말근무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 이는 다른 회사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다보니 높은 업무강도를 이기지 못하고 그만두는 직원도 많다. 그럴 때마다 업무공백을 메워야하고, 새로운 사람이 들어와도 적응할 때까지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이 대리의 고충은 계속된다.
야근과 주말근무가 이어져도 별도의 수당이 없는 점 역시 불만이다. 보상이 없으니 날이 갈수록 지친다.
"윗분들은 지금까지 다 그렇게 일해 왔어요. 부장급들은 야근하는 걸 당연시하는 분위기죠. 하지만 20∼30대 직원들은 받아들이기 힘들어 합니다."
이번 주말에는 다행히 근무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기대감에 들떠 있는 이 대리. 그는 오랜만에 아내와 함께 봄소풍이라도 떠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그에게 청천벽력같은 지시가 떨어진다.
"이번주 토요일에는 회사 차원에서 진행하는 사회공헌행사를 진행합니다. 토요일 오전 9시까지 ○○○보육센터로 집합하세요."
주말 근무를 피하기 위해 할아버지, 할머니, 외갓집 친척 어르신 등의 부고 핑계를 댄 것도 한두번이 아니다. 이제는 더 이상 둘러댈 만한 어르신도 없다. 이 대리의 체념어린 표정 뒤로 어느덧 시침은 9를 지나가고 있었다.
"직장인, 일주일에 4번 야근"
직장인 10명 중 8명은 하루 평균 3시간씩, 일주일 평균 4번가량 야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온라인 취업포털 '사람인'이 직장인 2900명을 대상으로 '직장인 야근 여부'에 대해 조사(2012년 2월)한 결과 81.4%가 '야근을 하고 있다'고 답했다. 일주일 평균 야근 횟수는 5번(26.2%), 3번(19.9%), 4번(16.3%), 2번(15.5%) 순으로, 일주일에 평균 4번가량 야근을 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하루 평균 야근시간은 3시간16분. 일주일 평균 12시간, 월 평균 48시간의 초과 근무를 하고 있는 셈이다.
야근을 하는 이유로는 절반 이상인 52.4%(복수응답)가 '업무량이 너무 많아서'라고 답했고 ▲업무 특성상 야근이 많아서(36.5%) ▲퇴근하기 눈치 보여서(28.7%) ▲불규칙한 업무로 본 업무에 지장을 받아서(26.8%) ▲일을 대신 해줄 사람이 없어서(25.1%) ▲상사가 야근을 강요하는 편이라서(24%) 등의 순이었다.
야근이 미치는 영향으로는 '사생활이 없어졌다'(70.5%, 복수응답), '피로 등으로 건강이 나빠졌다'(66.8%), '짜증이 늘었다'(56.4%), '가족·친구 등 주위에 소홀해졌다'(56.3%), '애사심이 줄어들었다'(38.4%), '업무집중력이 떨어졌다'(37.9%) 등 부정적인 답변이 주를 이뤘다.
하지만 야근에 대한 보상을 받는 직장인은 절반 이하(49.5%)에 불과했다. 보상을 받는 경우 수당은 시간당 평균 1만1000원, 식대는 5700원 수준으로 집계됐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278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