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있어 좋다/ 나를 이뻐해 주셔서/ 냉장고가 있어 좋다/ 나에게 먹을 것을 주어서/ 강아지가 있어 좋다/ 나랑 놀아주어서/ 아빠는 왜 있는지 모르겠다'. 몇해 전 예능프로그램에 소개돼 화제를 모았던 <아빠는 왜?>라는 시다. 초등학교 2학년 어린이가 썼다는 이 시는 당시 많은 아빠들에게 웃음과 동시에 큰 충격을 안겨줬다.
이처럼 '존재감 제로'였던 아빠의 이미지가 확 달라졌다. 강아지보다 못한(?) 아빠가 아니라 가족의 중심에 있다. '친구 같은 아빠'는 요즘 가장 주목 받는 문화코드다. '아빠와 자녀의 여행'을 콘셉트로 내세운 TV 예능프로그램이 인기행진을 하는 것을 비롯해 공연·영화·레저·유통업계 등에도 아빠 열풍이 확산되고 있다.
◆ '흥행 보증수표'로 떠오른 아빠
'플대디'(Play+Daddy), '프레디'(Friend+Father), '스칸디 대디'(Scandi Daddy)…. 최근 신조어의 핫한 키워드는 '아빠'다. 아이와 잘 놀아주는 아빠, 친구 같은 아빠, 정서적 교감을 나누는 아빠가 대세다.
올 초 스타 배우도, 화려한 볼거리도 없는 영화 한편이 극장가에 파란을 일으켰다. 한국 영화사상 8번째로 1000만 관객을 돌파한 <7번방의 선물>이다. 이 영화는 역대 1000만 관객 동원 영화 중 가장 적은 제작비(35억원)로 만들어졌음에도 '딸 바보' 아빠의 지극한 부성애로 국민들의 심금을 울리며 극장가를 점령했다.
지난 4월 개봉한 이래 150만 관객을 돌파하며 흥행몰이 중인 <전설의 주먹>역시 진한 부성애를 다뤘다. "영화를 찍으면서 아버지가 보고 싶었다"는 주연배우 유준상의 말처럼, 이 영화는 팍팍한 현실에서 고군분투하는 아버지의 사랑을 일깨우며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
TV도 온통 '아빠 천하'다. 캠핑과 여행 바람을 몰고 온 <아빠 어디가>와 같은 예능프로그램은 물론 코미디와 드라마에도 '아빠 바람'이 넘쳐난다. 최근 <개그콘서트>에서는 부성(父性)을 소재로 한 '나는 아빠다' 코너를 새롭게 선보였다. 김대희, 박성호, 홍인규, 송준근 등이 아빠로서의 애환을 웃음으로 승화시킨다. 드라마도 마찬가지다. 가슴 시린 아버지의 사랑으로 시청자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 <내 딸 서영이>가 인기리에 막을 내린 데 이어, 천재 딸을 기르는 무식한 아버지의 사랑을 다룬 <출생의 비밀>이 방송 초반부터 시청자들의 호응을 얻고 있다.
캠핑시장이나 유통업계, 호텔업계도 아빠의 존재감으로 들썩인다. 2008년 700억원 수준이었던 캠핑시장 규모는 올해 4000억원을 상회할 것으로 예상된다. 옥션에서는 지난 4월 캠핑용품의 판매량이 전년 동월대비 75%나 증가했다. 특히 그릴, 버너, 장작 등의 캠핑취사용품은 95%나 늘었다. 김용규 옥션 스포츠팀장은 "아빠와 함께 하는 캠핑문화가 확산되고 있어, 캠핑용품 카테고리의 상품군을 강화하고 무료 캠핑 지원 이벤트를 여는 등 캠핑과 관련한 다양한 마케팅을 진행하고 있다"고 전했다.
◆ "아빠가 달라졌어요" 이끄는 X대디
아이낳기좋은세상 서울운동본부와 한국워킹맘연구소에서 지난해 아빠 교육프로그램 '고고대디스쿨'에 참여한 30~50대 워킹 대디 28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의 93%가 "아이에게 친구 같은 아빠이고 싶다"고 답했다. 실제 아이에게 어떤 아빠인지를 묻는 질문에는 48%가 '친구 같은 아빠'라고 답했다.
전문가들은 핵가족화로 가정 내 아빠의 역할이 부각되고 젊은 세대의 '좋은 아빠'가 되려는 욕구가 맞물려 전통적인 아버지상을 바꾸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수연 한국워킹맘연구소장은 "아빠의 육아 참여가 높을수록 아이의 자아존중감과 정서가 발달된다는 '아빠효과'(the effects of father)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아이와 소통하기를 원하는 아빠들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일보다는 가족, 먼 미래보다는 현재 자신의 행복에 충실한 'X세대'가 아빠가 되면서 변화를 이끌고 있는 것으로도 보인다. 이른바 'X대디'다. 아빠가 된 X세대는 '자기중심주의'를 '가족중심주의'로 발전시켰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들은 주말에 업무골프 대신 캠핑을 즐기고, 자녀교육에 적극적이다.
광고대행사 이노션 월드와이드의 소비자 조사(2011년) 결과에 따르면 "수입을 위해 일을 더 하는 것보다 여가시간을 더 갖는 것이 좋다"고 답한 비율이 X대디인 30대(54.3%)에서 단연 높았다. 20대는 47.5%, 40대와 50대는 30%대에 머물렀다.
반면 "경력관리를 위해서라면 가족과 떨어지더라도 해외에서 근무할 의향이 있다"고 답한 비율은 30대(38.4%)가 다른 연령대에 비해 가장 적었다. 급여가 적더라도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이 많은 쪽을 선호하는 것이다.
최창원 이노션 브랜드커뮤니케이션연구소 박사는 "X세대는 과거 산업화세대인 자신의 아버지들이 회사에 모든 걸 걸었던 허무함을 목격한 세대로, 가족중심주의의 새로운 아버지상을 찾아가려는 경향이 강하다"고 말했다.
◆ '친구같은 슈퍼맨 아빠' 스트레스도 급증
우리사회 비주류 코드인 '아버지'가 부각된 경우는 사실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어깨가 처진 아버지들을 위로하기 위한 부성애 코드가 넘쳐나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와는 접근법이 다르다. 지친 아버지가 아니라 가족을 대표하는 따뜻한 아버지가 부각되는 것이 트렌드다.
김진세 고려제일신경정신과 원장은 "<아빠 어디가> 프로그램에서 아이들의 순수한 동심을 보는 재미도 있지만, 무엇보다 서먹하고 안 좋았던 아빠와 자녀사이가 좋아지는 모습이 더욱 감동적으로 다가온다"며 "아버지의 역할 부각은 가정 내에서 남성의 성 역할을 경험적으로 알려주고 자녀의 자존감을 높여준다"고 말했다.
한편 최근의 아빠 열풍은 '좋은 아빠' 스트레스로도 이어지고 있다. 아빠의 역할이 매우 중요해진 만큼 이에 대한 교육을 제대로 받아본 적이 없는 남성들의 고민이 갈수록 깊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수연 소장은 "좋은 아빠가 되고 싶지만 근무여건 등이 녹록지 않고 소통방법도 모르는 아버지들의 혼란이 커지고 있다"며 "주기적으로 아빠교육을 통해 아이의 연령대별 특성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자녀와 훨씬 친밀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고 말했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279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