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중은행이 유동성 위기에 빠졌다. 일본의 저환율 정책과 글로벌 경기침체 등으로 고배를 마시고 있는 대기업들이 늘어나면서 이들에 돈을 빌려준 은행들이 타격을 받고 있는 것. 특히 그동안 건설부문에만 집중된 취약업종이 조선과 해운시장까지 확대되고 있어 향후 부실기업이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대기업 부실은 웅진과 쌍용건설, STX그룹 등이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 혹은 자율협약(채권금융기관 공동관리)으로 기업 구조조정에 돌입하면서 본격화됐다.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곳은 금융권 자율협약이 진행 중인 STX그룹. STX그룹의 지난달 말 금융권 여신규모는 13조1910억원에 달한다. 은행별로는 주채권은행인 KDB산업은행의 대출규모가 3조8950억원으로 가장 많다. 그 다음은 수출입은행(2조2762억원), 농협(2조2399억원), 우리은행(1조5334억원), 정책금융공사(1조1346억원) 순이다
문제는 STX그룹이 유동성 위기를 겪으면서 금융권 빚을 상환하기 힘든 상황이라는 점이다. 현재 STX그룹은 주요 계열사인 ㈜STX, STX조선해양, STX엔진이 모두 채권단 자율협약을 신청한 상태다.
만약 자율협약이 체결되면 채권은행은 추가로 자금을 쏟아 부어야 한다. 올해 STX그룹에 지원해줘야 할 자금은 3조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또한 만기가 돌아오는 회사채 상환, 운영자금 지원 외에도 대손충당금을 추가로 쌓아야 한다.
은행권 관계자는 "현재 선박·공사 수주에 들어간 7조원이라도 돌려받으려면 채권은행들은 어쩔 수 없이 자율협약에 동의해야 한다"면서 "이 때문에 부실 대기업에 추가 자금지원은 물론 충당금을 더 쌓아야 하는 곤란한 상황에 놓였다"고 답답해 했다.
◆극동건설·웅진 부실도 '걱정'
극동건설과 쌍용건설, 웅진홀딩스도 금융권을 울상 짓게 하고 있다. 쌍용건설과 극동건설의 금융권 부채규모는 현재 각각 7000억원, 6300억원에 이른다. 또 웅진홀딩스 역시 3830억원을 웃도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중 극동건설의 주채권은행인 신한은행의 대출규모는 520억원, 수출입은행 1200억원, 우리은행 500억원, 하나은행 200억원, KDB산업은행 150억원 등이다.
우리은행이 주채권은행인 웅진홀딩스 역시 대출규모가 1250억원에 달한다. 은행별로는 하나은행(1000억원), NH농협은행(200억원) 순이다. 웅진홀딩스가 발행한 회사채 규모는 6500억원 수준으로 여기에 보증까지 합치면 웅진그룹의 금융권 익스포저는 3조7400억원으로 잠정 집계된다.
이러한 영향 탓에 부실채권도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금융감독원이 발표한 자료를 보면 지난 3월말 기준 은행권의 부실채권 잔액은 20조5000억원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말보다 2조원 증가한 수치다. 또 올해 1분기 은행권의 신규 부실채권 규모는 약 5조6000억원으로 지난해 4분기 6조3000억원보다 줄었고, 부실채권 정리규모도 9조6000억원에서 3조7000억원으로 5조9000억원 감소했다.
전체 대출 중 부실채권이 차지하는 비율은 지난해 말(1.33%)보다 0.13%포인트 상승한 1.46%로 집계됐다. 은행권 관계자는 "대기업의 경우 대출규모가 수조원에 달하기 때문에 부실이 발생하면 파급력이 엄청나다"면서 "특히 대기업이 무너질 경우 하청업체들도 줄줄이 타격을 보게 된다. 이는 국가경제의 큰 틀이 무너지는 상황까지 올 수 있다"고 우려를 표했다.
◆대기업 구조조정 나선 금융당국
대기업의 부실이 늘어나는 것도 문제지만 부실의 질이 악화되고 있어 대책마련이 시급한 상황이다. 부실채권은 부실정도에 따라 고정·회수의문·추정손실 등으로 나뉜다. 그런데 올 들어 고정과 회수의문은 각각 1조3000억원, 2200억원 늘어난 데 비해 사실상 '떼인 돈'으로 보는 추정손실은 무려 2조4000억원이나 증가했다. 추정손실의 증가율은 25%로 고정(6%), 회수의문(12%) 증가율의 2~4배에 이른다.
이에 따라 금융당국도 대안마련에 급급한 모습이다. 금융당국은 우선 대기업의 방만한 경영과 무분별한 투자행위를 막기 위한 '주채권은행 업무 가이드라인'을 마련해 이르면 6월 중 은행연합회 준칙에 포함시킬 방침이다.
가이드라인에는 대기업에 대한 채권은행의 정보수집방법, 은행간 수집정보 공유, 경영지도 범위 등에 대한 기준이 담긴다. 해당기업의 경영정보를 주채권은행과 다른 채권은행이 공유하게 되는 셈이다. 한 대기업의 채권을 가진 은행들이 공동으로 재무 명세를 요구하면 대기업이 거부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계산도 깔렸다.
당국은 재무현황 등을 은폐하거나 제대로 보고하지 않는 대기업에 대해서는 은행권이 공동으로 대출을 회수하는 강경조치까지 포함할 예정이다. 최근 웅진이 주채권은행과 아무런 협의도 없이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를 신청하는 경우가 발생해 앞으로 기업의 이런 독단적 행위를 사전에 막으려는 조치다.
이와 함께 감독당국은 주채권은행이 대기업 재무관리를 잘하는지 파악하기 위해 현장 검사 등을 주기적으로 단행하기로 했다. 만약 문제가 적발되면 제재하는 방안도 고려중이다.
여기에 내년 상반기부터는 재무구조가 취약한 대기업의 원활한 구조조정을 위해 회사채·기업어음(CP) 등 시장 차입금도 주채무계열 선정 시 대상 채무에 반영된다. 기업이 회사채를 조달해 은행 빚을 갚고 주채무계열 관리대상에서 빠지는 방식으로 주채권은행의 관리를 피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올해는 현대자동차 등 30개 재벌 그룹이 주채무계열사에 포함됐으나 이런 기준을 적용하면 내년 하반기에는 40여개 정도로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은행권의 반응은 싸늘하기만 하다. 현재 대기업 부실자금을 대부분 은행권이 떠안고 있는 상황이어서 실효성이 없다는 게 가장 큰 이유다.
은행권 관계자는 "이미 대기업들의 부실규모가 천문학적인 수준으로 올라가고 있다"면서 "아마도 은행의 올 상반기 실적은 전년에 비해 절반 이상 고꾸라질 것으로 보인다"고 우려를 표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무엇보다 금융당국이 내세운 방안이 실효성을 거두기 힘들어 보인다"면서 "지금은 대기업들의 대규모 부실자금을 상당부분 은행들이 떠안는 정책부터 일부 개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280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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