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19년 전, 대학 4학년에 재학중이던 한 학생이 4명 규모의 소프트웨어 개발기업을 창업했다. 이 청년은 '잠들지 않는 시간'이라는 PC통신 프로그램으로 사업을 시작, 2000년대 이후 인터넷 관련 프로그램을 개발해 회사를 키웠다. 현재는 인터넷뿐 아니라 모바일 관련 소프트웨어로 사업아이템을 확대해 성장가도를 달리고 있다. 그가 세운 벤처기업은 이제 연간 매출액 340억원(자회사 매출 포함), 총 종업원수 174명 규모로 성장했다.
IT업계에서 성공한 벤처 1세대로 꼽히는 지란지교소프트의 오치영 대표 이야기다.
그가 사업을 처음 시작하던 1994년은 '벤처 불모지'나 다름없던 시절.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선배도, 마땅한 투자지원책이나 투자유치 노하우도 전무했다. '제2의 벤처붐'을 일으키려는 정부의 적극적인 제스처에 그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취지의 대책도 벤처·창업가의 피부에 와 닿지 않는다면 '빛 좋은 개살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게 오 대표의 시각이다.
그렇다면 벤처 1세대가 바라보는 '2세대 벤처에게 진짜 필요한 도움'은 뭘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성공한 선배'와 '재기 가능한 환경'이다. 서울 대치동의 지란지교소프트 사무실에서 만난 오 대표는 그에 대한 이유를 하나씩 설명했다.
◆가장 필요한 건 끌어주고 투자해줄 '선배'
우선 오치영 대표는 벤처를 운영하며 끌어주고 투자해줄 '선배'의 존재가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좋은 아이템을 가진 곳에 정부가 직접 돈을 주는 식의 지원보다는 시장논리에 따라 자연스럽게 벤처에 자금이 흘러갈 수 있도록 생태계를 조성하는 게 중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선배, 그러니까 성공한 벤처 1세대들의 투자의욕을 자극해야 한다는 것.
오 대표는 "예전에는 가능성이 있는 벤처에 저리로 대규모 자금을 빌려주는 식의 지원이 있었다"며 "이런 식으로 지원이 이뤄지다보니 기업들이 '은행에만 넣어둬도 이익'이라는 생각에 일단 돈부터 받고 본다. 이후 돈은 다 써버리고 결국 상환능력이 안돼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았다"고 털어놨다.
정부가 직접적으로 기업에 돈을 쏟아 붓는게 아니라 성공한 벤처 또는 자금여력이 있는 이들이 벤처에 투자할 수 있게 세제혜택을 줄 필요가 있다는 설명이다. 이것이 전제될 때 1세대가 신생벤처에 투자하고 또 성장한 신생벤처가 또 다른 스타트업을 끌어주는 선순환 구조가 시작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런 점에서 오 대표는 이번에 정부가 발표한 '벤처·창업 자금생태계 선순환 방안'에 대해 긍정적이라고 밝혔다. 5000만원 이하 엔젤투자에 대한 소득공제비율을 기존 30%에서 50%로 확대 적용키로 한다는 세제지원방안과 성공한 벤처가 후배 기업에 투자하려고 펀드를 만들면 정부도 '후배 육성펀드'를 조성해 함께 출자하는 방안 등이 포함됐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세제혜택을 받는다면 나 같아도 세금 낼 돈으로 투자를 하겠다"며 "다만 5000만원을 초과하는 투자금액에 대해 기존 소득공제비율인 30%를 적용하기로 한 것은 아쉽다. 요즘에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접목한 아이템 등 큰 규모의 스타트업을 준비하는 이들도 많기 때문에 투자금액이 너무 작을 필요는 없다"고 주장했다.
소득공제율 50%를 적용하는 투자금액 범위를 5000만원 이하가 아닌, 2억원 이하로 확대하는 것이 적당하다는 논리다.
또한 오 대표는 "투자에 대한 세제혜택뿐 아니라 벤처 1세대가 경영이나 판로개척에 대한 노하우 등을 전수하는 '멘토'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인센티브 등 관련 활동을 장려할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패가망신' 아닌 '패자부활'할 수 있게 해달라"
오 대표는 벤처가 한번의 실패로 패가망신하지 않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야 한다는 점도 제2의 벤처붐을 이끌 중요한 요소라고 피력한다. 벤처기업의 부채에 대한 확실한 보증이 지원돼야 한다는 의견이다.
그는 "우리 회사만 해도 내가 보증을 선 게 몇십억원 된다. 이런 상황에서 회사가 잘못될 경우 과연 재기할 수 있겠는가. 어렵다고 본다"며 "부채에 대한 보증이 얼마나 지원되는가, 보증 없이 비즈니스가 가능할 정도로 투자를 원활히 받을 수 있는 환경인가가 그 사회 벤처들의 재기 가능성을 가늠하는 직접적인 잣대"라고 밝혔다.
벤처·창업 기업의 생사를 대표이사의 신용, 돈 빌리는 능력에 의존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설명이다. 한번의 실패로 벤처기업가들이 신용불량자로 전락해 가족들과 헤어져 찜질방을 전전하는 일이 계속 생겨나면 결국 벤처 활성화는 요원해질 것이라는 얘기다.
이런 점에서 그는 이번 정부가 발표한 방안에 연대보증 폐지에 관한 내용이 담긴 것은 백번 잘된 일이라고 덧붙였다.
오 대표는 "실패한 벤처의 회생을 가로막는 것이 바로 연대보증인 만큼 연대보증 폐지방안이 과연 얼마나 현실화될 것인가가 벤처 활성화 성공의 관건이 될 것"이라며 "연대보증을 없애는 대신 금융권이 돈을 안 빌려주거나 벤처에 빌려줄 금액을 줄여버리는 식으로 꼼수를 쓸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 벤처 1세대의 명과 암
'성공한 이들, 그리고 역사속으로 사라진 그들'
벤처기업 3만개 시대를 코앞에 둔 대한민국. 하지만 실상은 코스닥·코스피에 상장된 벤처기업들이 1%도 채 안된다. 성공한 벤처보다 정체상태에 있는 벤처가 더 많고 역사속으로 사라진 벤처는 그 수를 가늠하기 힘들 정도다.
성공한 벤처 1세대로 꼽히는 기업은 단연 1990~2000년대 초반 설립된 NHN, 다음커뮤니케이션, 넥슨, 엔씨소프트, 안랩 등이다. 이들은 현재 포털(NHN, 다음), 게임(넥슨, 엔씨소프트), 정보보안(안랩)업계에서 1, 2위를 차지하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이들 보다 앞서 1980년대에 설립돼 '대한민국 벤처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비트컴퓨터는 의료정보시장에서 건재함을 자랑하고 있다.
하지만 대다수 벤처 1세대 기업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 특히 분식회계, 주가조작 등으로 '지저분한 말년'을 보내다 쓰러진 기업들이 아직까지도 '타산지석' 사례로 거론되곤 한다.
인터넷전화 '다이얼패드'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지만 CEO 분식회계와 경영권 분쟁으로 자취를 감춘 새롬기술, 유망 닷컴기업으로 주목받다가 창업자의 자금횡령 사건으로 문을 닫은 인츠닷컴, '광고를 보면 돈을 준다'는 콘셉트로 사업을 시작했다가 광고주의 외면과 주가조작·횡령 등 각종 비리로 쓰러진 골드뱅크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외에도 벤처 버블 이후 실적부진과 경영악화로 소리소문 없이 셔터를 내린 기업들이 상당수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282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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