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귀한 이동수단으로는 많은 동호인들에게 '짐승'의 영예를 안겨주는 자전거가 대표적이요, 앙증맞은 바퀴를 단 스케이트보드는 '동생' 격이라 하겠다. 이 동생을 우습게만 보면 안 되는 것이 단일 품목 단일 디자인을 놓고 볼 때 형보다 동생이 열배는 더 팔리고 백배는 더 유명하다.
◇ 백과사전에 오른 운송수단 혁신기술 '에스보드'
고품질의 자동차와 선박을 많이 만들어 전 세계에 공급하는 우리나라에서 부끄럽게도 새로운 기술을 '창조'했다거나 기존 기술에 비해 '도약'을 이뤄냈다고 평가받는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운송수단 영역을 포괄적으로 관찰하면 온라인 백과사전 위키피디아에 등재된 '진정한 혁신' 사례가 발견되니, 자력추진 기능을 갖춘 스케이트보드인 '에스보드'(ESSBOARD)가 그 영광의 주인공이다.
2003년 하반기에 첫 모델을 출시한 에스보드는 기존의 스케이트보드와는 달리 발로 땅을 구르지 않고도 자체적으로 추진력을 발생시키는 메커니즘을 탑재하고 있었다. 자력추진 메커니즘의 핵심 구성요소는 '방향성 캐스터'로서, 통상적인 캐스터 바퀴가 지면과 수직한 조향축을 갖는 반면 에스보드의 바퀴는 조향축이 앞쪽으로 기울어진 상태로 발판 아래에 결합되어 있다. 이러한 결합구조에 따라 바퀴의 조향각도가 커질수록 발판이 상승하는 현상을 보이며, 이는 거꾸로 발판을 누르는 힘이 바퀴를 제자리(후방 정중앙)로 돌려놓으려는 경향성을 가짐을 뜻한다.
에스보드는 두 개로 나뉜 발판에 각각 하나의 캐스터가 장착되었고 두 발판이 서로 반대방향으로 비틀릴 수 있는 구조로 연결되었으며, 비트는 힘이 제거되면 원상태로 돌아오도록 탄성체가 추가되었다. 주행 시 양쪽 발을 교차시켜 앞뒤로 움직이면 발판 아래 하나씩 위치한 바퀴는 지면에 대각선을 그리며 구르되, 체중이 발판을 누르고 있으므로 바퀴가 제자리로 돌아오려는 힘이 지면을 대각선의 바깥으로 밀어내게 된다. 여기서 지면을 미는 힘의 주행방향 분력이 에스보드의 추진력이다.
◇ 에스보드의 영광과 좌절
에스보드를 출시한 (주)데코리(현 (주)슬로비)의 강신기 대표가 출시 1년 뒤, 자서전 '지구를 흔든 남자'(이가서 刊)를 출판하자 '서울역 노숙자였다가 발명 하나로 미국시장에 진출한 CEO'라는 솔깃한 인생역전 스토리는 제품보다 더 유명세를 탔다.
출시 후 1년간의 수상내역은 화려했다. 벤처디자인상 금상(한국디자인진흥원 2003.12.18) 특허기술대전 국무총리상(한국발명진흥회 2003.12.19) 수출기업화사업 선정(중소기업청 2004.02.02) 우수벤처기업 대상(매일경제 2004.04.29) 미국국제발명전(INPEX 2004.05.15.) 그랑프리 수상이 그 예다.
특히 유명세 절정은 강신기 대표가 TV 공익광고에 출연했을 때다.
이후 에스보드 사업은 겉으로는 잘나가는 듯하나 국내와 해외 모두에서 큰 어려움을 겪게 된다. 국내문제는 '짝퉁과의 전쟁'이었고 해외문제는 추측건대 로열티 협상이 매끄럽게 진행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 '짝퉁' 천국에서 태어난 진짜 발명품
조그마한 아이디어로 특허권을 획득한 업체가 중국산 불법복제품(짝퉁) 때문에 사업진행에 차질이 발생한다면, 이 업체 사장은 정부의 '부실한 특허권 보호 정책'을 성토할 것이다. 한편, 성공적인 수입 유통업을 영위하는 업체 사장은 '특허 무용론'을 외치기 쉽다. 중국 공장과 거래하는 수입업자들 중에는 어떤 특허제품이든 자신이 한번 보면 '반짝이는 아이디어'로 특허권을 회피하여 비슷한 제품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진 이들이 많다.
그들은 또한 이러한 제품을 한국에서 팔아왔기 때문이다. 자본력을 갖춘 해외기업도 기술특허를 타국에 출원해서 관리하는 데는 많은 비용이 들기 때문에 그만큼 수익이 발생할 것으로 기대되지 않는 나라엔 웬만해선 출원하지 않는 것이 정석이다. 국내에 특허권이 없는 발명품은 아무나 복제해서 유통시켜도 법적으로 문제될 게 없고, 이렇게 너도나도 경쟁적으로 수입해서 수 십 년간 장사를 해오다 보니 특허는 그저 '경쟁 수입품과의 차별화를 위한 장식품' 또는 '한국형으로 재개발하기 위해 정부지원금을 타내는 용도'쯤으로 여긴다.
이처럼 아이디어의 가치와 발명자의 공로가 무시되는 분위기 속에서, 중국으로부터 에스보드 짝퉁들이 줄지어 들어왔다. 제품 전체를 꼼꼼하게 베낀 것부터 일부 구성품을 창의적으로 변형한 것까지 '세상의 모든 짝퉁'이 시장에서 에스보드 정품과 경쟁하는 상황이 벌어졌고, 수입업자들은 전부터 해오던 일을 특별히 열심히 한 것도 아닌데도 여러 명이 갑자기 범법자가 되었다. 에스보드는 한국의 발명품이요 특허권도 강력했기 때문이다.
당시 불법복제품 단속에 연관된 수입업자들이 얼마나 놀랐을지는 에스보드의 특허심판 기록 열람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짝퉁을 수입해서 팔다 제재를 당한 수입업자들 중에 누군가는 "내 수입품은 정품의 특허범위에 속하지 않는다"든지 또는 "정품 자체가 원래 특허를 받을 수 없는 아이디어다"라고 주장하고 싶었던 것이다.
◇ 핵심을 빗겨나 작성된 청구항
국내에서 수입업자들의 몰상식과 그들의 무모한 투쟁을 부추기는 변리사들과 전쟁을 치르는 동안 미국에서는 특허권 획득 과정이 순탄치 않았다. 통상적인 특허심사 기간이 2년인 반면 2003년에 출원된 에스보드의 미국 특허가 최종 등록되기까지는 두 배인 4년이 걸렸다.
에스보드가 탄생하기 전까지 세상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아이디어'는 무엇일까? 2002년에도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국산 발명품이 있었다. 전통적인 '외날 스케이트'에서 힌트를 얻어 2000년에 발명되고 2002년 제이디모터스가 출시한 '롤키'(Rollky)는 '조향축이 기울어진 캐스터 앞바퀴'로 추진력을 발생시킬 수 있었다. 이 자체추진 기능은 발명자가 의도한 것이 아닌 여러 사용자의 우연한 발견이었으나 에스보드보다 앞선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롤키의 우연한 발견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양발을 모두 이용하여 추진력을 발생시키면 어떨까'라는 호기심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에스보드다. 이에 따라 오른발과 왼발이 서로 상대운동을 할 수 있도록 스케이트보드의 발판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야 할 것이고, 캐스터도 발판마다 장착되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러니까 에스보드 발명의 핵심 구성은 '①두 개의 발판, ②두 발판 아래에는 방향성 캐스터가 적어도 하나씩 위치하되 ③각 캐스터의 조향축은 동일한 방향으로 기울어졌으며, ④두 발판이 서로 연결된 상태를 유지하되 상대적인 움직임을 허락하는 연결구조'로 정리된다.
청구항을 이렇게만 작성해도 '두 발로 움직이는 최초의 캐스터 스케이트보드'가 되니 특허등록은 따 논 당상이었으나 어찌된 영문인지 최초 출원된 청구항에는 캐스터의 조향축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논리적인 미국 특허청 심사관이 첫 번째 거절의사를 보내왔을 때 출원인은 청구항 내의 '방향성 캐스터'를 '기울어진 방향성 캐스터'라고 수정했고 그걸 받아본 심사관이 최종 거절의사를 통보하자 다시 출원인은 '조향축이 기울어진 방향성 캐스터'라고 수정했다.
에스보드 특허 출원인은 '조향축이 한쪽 방향으로 기울어진 캐스터'를 뜻하는 용도로 '방향성 캐스터(direction-caster)'라는 명칭을 사용하였으나 안타깝게도 미국에서는 사무실 의자에 달린 바퀴 이름도 방향성 캐스터였던 것이다.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담았다는 특허가 단번에 등록되지 않고 선행기술에 발목이 잡혀 심사기간이 계속 늘어난다면 계약이 순조롭게 진행될 리 없다. 한참 시간이 지난 뒤 등록받은 특허를 가지고 협상 테이블에 앉으면 상대방은 지연기간 동안 얼마나 많은 경쟁기술이 등장했는지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설명하며 단가를 후려칠 것이다.
◇ 아이디어는 여전히 대박 진행 중
2007년 3월 27일에 등록된 미국 에스보드 특허권은 2008년 12월 23일 킥보드의 대명사 레이저(Razor)에게 양도되었다. 레이저는 에스보드의 미국형 제품을 '립스틱'(RipStik)이라는 이름으로 2007년에 출시했다. 그리고 국내에서 에스보드가 반짝 인기를 끈 뒤 최근에는 주변에서 목격하기 어려워진 것과 달리 립스틱은 여전히 세계적으로 인기가 높다. 에스보드 사업은 실패적이었으나 그 아이디어는 여전히 세상에 공헌하고 인정받는 셈이다.
◇ 스토리마케팅에 가려진 진실··· 누구의 아이디어인가?
특허문서들을 열람하면서 가장 놀라운 발견은 에스보드의 진짜 발명자를 알게 된 것이다. 그의 이름은 고진경. 2002년 5월1일에 '흔들어서 나아가는 구름판'이란 제목의 특허를 출원했고, 이듬해인 2003년 4월8일 (주)데코리에 특허권을 양도했다. 앞서 소개한 '등록된 에스보드 특허'(KR10-0394848)는 고진경씨의 최초 출원일자를 소급적용 받은 '후출원' 건으로서 두 특허 명세서는 사실상 하나이므로 중간에 발명자 이름이 바뀌어 기재되었더라도 내용상 추가된 '발명'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에스보드는 통째로 고진경씨의 발명이요, '기술로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한 공로'의 가장 큰 비중역시 고씨의 것이다.
영문 위키피디아(Wikipedia)에는 에스보드가 '캐스터 보드'(Caster board)라는 명칭으로 기록되었다. 그런데 해당 페이지에 혁신기술의 탄생지인 'Korea'라는 단어가 보이지 않는다. 누군가 캐스터보드가 '대한민국의 운송수단 혁신기술'임을 위키피디아에 기록하고픈 욕구를 갖는다면 진짜 발명자의 '이름(Jinkyung Go)'을 꼭 넣어주기 바란다. 한편 강신기 대표가 에스보드를 발명한 것은 아니지만 발명품의 뛰어난 가치를 간파하고 상업화에 힘쓴 노력만큼은 인정받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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