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호 동아제약(현 동아쏘시오그룹) 회장이 박카스의 작명을 두고 고민하던 중이었다. 문득 머릿속에 독일 유학시절 함부르크시청 지하 홀 입구에서 봤던 박카스 신이 떠올랐다. 박카스는 로마신화에 나오는 술과 추수의 신이다. 애주가들의 간을 지켜주고 풍년까지 기원하니 상품명으로 더할 나위 없었다. 이렇게 1961년 9월 정제 형태의 박카스가 탄생했다.
박카스 돌풍은 정제가 아닌 드링크 형태로 바뀐 1963년 8월부터 시작됐다. 앞서 '박카스 정'은 미숙한 제제기술로 인해 반품사태를 겪었다. 이듬해에는 앰플제로 변경된 '박카스 내복액'을 다시 내놨지만 한번 더 제품 개선을 필요로 했다. 결국 이 같은 경험은 마침내 현재와 같은 50년 장수 자양강장제 '박카스D'(드링크)가 탄생하는 초석이 됐다.
50년 박카스 신화의 주역은 대량생산(Mass Production), 대량광고(Mass Communication), 대량판매(Mass Sale)로 구분되는 '3M 전략'이었다. 동아제약은 의약품의 광고 스타일인 전문지를 통한 의사·약사 대상의 광고방식에서 벗어나 TV, 라디오, 신문, 잡지, 옥외광고 등 모든 매체를 총동원했다. 특히 한창 선풍적인 관심을 모으기 시작한 TV 매체에 중점을 뒀다.
대대적인 광고 작전 효과는 금세 나타났다. 1963년 월평균 35만병을 상회하는 획기적인 판매기록을 세웠고 이듬해에는 월평균 56만병으로 급증했다. 발매한지 1년만인 1964년에는 670만병을 판매하며 드링크제시장에서 1위를 차지했다.
1964년부터 동아제약은 혁신적인 유통전략을 도입했다. 당시 의약품들은 도매상을 거쳐 소매약국에 출하되는 유통경로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동아제약은 특약점 제도를 도입해 소매약국에 박카스를 직접 유통시켰다. 이러한 유통전략은 현재 '박카스 루트세일'이라는 동아제약만의 독특한 유통시스템의 기반이 됐다.
이러한 전략을 토대로 1965년 이후 박카스는 기록적인 성장을 나타냈다. 판매수량이 1965년 980만병에서 이듬해에는 200% 이상 성장한 3000만병, 1967년에는 4700만병까지 늘어나면서 동아제약을 제약업계 정상에 올려놨다.
박카스의 성공 뒤에는 시련도 있었다. 1976년 7월 오남용을 일으킬 수 있다며 정부가 자양강장 드링크류의 일반 대중광고를 금지시키면서 박카스의 성장률은 낮아졌다. 절치부심하던 동아제약은 1993년 자양강장 드링크류의 광고금지가 해제되자 이를 절대적인 기회로 활용했다. 동아제약은 기존 드링크제와 차별화된 휴머니티 광고를 전개했다. 그 결과 1994년 '박카스F'의 매출액이 1000억원을 돌파하는 기염을 토했다.
1997년 몰아닥친 IMF 한파도 박카스의 열기를 식히진 못했다. 박카스는 당시에도 10%의 안정적인 성장을 하며 1480억원의 매출액을 달성했다. 이후 동아제약은 새로운 수요의 창출을 위해 '영 마케팅'을 추진했다. 이 홍보전략으로 젊은 층의 수요가 크게 증가했다.
드링크 형태의 박카스는 현재까지 약 177억병이 팔렸다. 판매된 병의 길이를 모두 더하면 지구를 52바퀴 돌고도 남는다. 지난 한해에만 4억8000만병, 금액으로는 1709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사회가 급변하면서 1년은 고사하고 불과 몇개월도 넘기지 못하는 제품들이 허다한 가운데 박카스는 '신화'로 불릴 만큼 반세기 동안 한결 같이 소비자 곁을 지키고 있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295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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