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가까이 노량진에서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아주머니의 우스갯소리다. 농담 속에 씁쓸함이 묻어나는 것은 아마도 오랜 세월 이곳에서 수험생들의 어두운 표정을 누구보다 많이 마주치면서 가지게 된 측은함이 컸기 때문일 터.
예전에는 자식 같은 학생들을 보면서 어미된 심정으로 밥상을 차려줬는데 이제는 40~50대 중장년층도 심심찮게 보이니 마음이 썩 좋지 않다는 게 아주머니의 말이다.
◆자격증 학원가로 변모 중인 노량진
노량진 학원가는 당초 입시 위주의 학원들이 몰려있던 곳이었지만 최근에는 대학문보다는 취업문을 두드리는 이들을 위한 학원이 더 눈에 띈다. 공무원 시험 학원을 비롯해 기타 기술직 및 자격증, 교원 임용고시, 경찰·소방·어학 등 각종 전문학원이 이 일대에만 50여곳에 이른다.
늦겨울 한파가 몰아치던 2월18일 새벽, 노량진 전철역 출구에선 마치 출근시간대의 강남역이나 광화문역을 방불케 하는 인파가 쏟아져 나왔다. 앞서 만난 아주머니의 말마따나 20대 청년들 틈새로 제법 나이 들어 보이는 이들이 속속 눈에 들어온다.
이들의 발걸음을 쫓아가다 들어가게 된 한 공인중개사 학원. 200명은 족히 들어갈 것처럼 보이는 넓은 강의실은 아침 9시 첫 수업부터 가득 차 있었다. 올해 공인중개사 자격시험을 치르려면 아직 8개월가량 남았지만 이들의 눈동자에는 벌써부터 다급함과 불안감이 엿보였다.
'국민자격증'이라고도 불리는 공인중개사 자격증은 그동안 퇴직자나 전업자의 전유물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최근에는 취업난 속에 자격증을 하나라도 더 따겠다는 목적과 더불어 대학 내 부동산학과의 개설이 늘어나면서 20대에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취득하려는 이들이 늘고 있다. 실제 이날 방문한 학원의 강의실에도 20대 후반부터 30대 초반까지의 취업준비생들이 상당수 눈에 띄었다.
서울 소재 K대학교 부동산학과 졸업을 앞두고 있는 한 취업준비생(27세·남)은 "취업할 때 유리할 것 같아 따려는 것도 있지만 전공을 살려 미래를 대비하려는 차원에서 준비 중인 면도 있다"고 말했다. 취업과 함께 노후준비까지 동시에 생각하고 있다는 점에서 요즘 청년들의 생각을 어느 정도 읽어볼 수 있었다.
◆'士'자 자격증 위해 일년 내내 고시생 모드
인근 자격증 학원을 더 돌아다녀본 결과 회계사나 노무사, 세무사와 같이 시험 합격이 곧 전문직종 취업과 직접 연계되는 자격증의 인기는 일반 스펙형 자격증보다 더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만 이들 시험은 사법고시나 행정고시를 뺨칠 정도로 난이도가 있어 장기간 레이스를 해야 한다. 또한 같은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끼리의 정보공유가 중요해 학원 오프라인 강의보다는 스터디 그룹을 짜기 위해 모이는 이들이 더 많다고.
올해로 2년째 회계사 시험을 준비 중인 전모씨(29세·남)는 "그전에는 대기업에 취직하기 위해 여러 자격증도 따고 사회활동도 열심히 했는데 일년 정도 해보니 비전이 안보였다"면서 "오히려 그 시간에 공부 역량을 한곳에 집중시켜 전문직에 바로 종사하는 편이 낫겠다는 판단에서 시험을 준비하게 됐다"고 말했다.
점심시간에는 노량진의 명물로 꼽히는 컵밥을 먹어보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역시나 컵밥을 파는 포장마차 앞에는 수많은 수험생들이 꼬깃꼬깃한 1000원짜리 두어장을 내밀며 배고픈 배를 급히 채우고 있었다.
이곳에서 만난 한 20대 중반의 여성에게 추운 날 밖에서 끼니를 해결하는 것이 힘들지 않냐고 물으니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그는 "요즘은 굳이 컵밥이 아니어도 무한리필 식당이나 고시생 뷔페를 찾는 사람도 많다"면서 "그런데 사실 나와서 먹는 일도 거의 드물다. 돈도 돈이지만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라도 대부분 도시락을 싸서 다니거나 기숙사에서 간단히 해결한다"고 말했다.
그렇게 3분이나 조금 넘게 먹었을까. 어느덧 기자와 취재원의 컵은 금세 비워졌고 그는 바쁜 걸음으로 다시 학원으로 돌아갔다.
◆스펙파괴시대 맞춰 이색 자격증도 인기
늦은 시각, 이번에는 강남으로 장소를 옮겼다. 특별한 취미로 자격증을 취득한다는 사람들이 있어 찾은 곳은 서초구 양재동에 위치한 한 스쿠버다이빙 자격증 학원. 취업 경쟁이 치열한 요즘 같은 시대에 여가생활처럼 보이는 레저로 자격증을 따기 위해 모였다고 하니 처음에는 의아하고 다소 여유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한 수험생의 말을 듣자마자 사라졌다. 이곳에서 만난 취업준비생 진모씨(27·여)는 이론교육을 받기 위해 이곳을 처음 방문했다고 한다. 진씨는 "평일 오전과 오후에는 일반적인 자격증과 어학공부에 시간을 할애하고 저녁에는 재즈보컬 학원이나 네일아트숍, 그리고 주말에는 스킨스쿠버 등 색다른 취미 자격증을 따기 위해 돌아다닌다"고 말했다.
진씨뿐 아니라 또 다른 20대 청년 취업준비생 한명도 특별한 자기소개서 완성을 위해 비슷한 노력을 기울인다고 토로했다. 일반적인 컴퓨터나 어학 자격증은 너나 할 것 없이 다 가지고 있어 이제는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것. 취업 준비를 위한 이색 자격증을 따는 데 들인 돈만 수백만원에 이른다고 고백했다.
업무와 관련이 없는 자격증이지만 취업에는 많은 도움이 된다는 게 이색 자격증을 따려는 사람들의 공통된 목소리다. 스펙시대에서 스펙파괴시대로 접어들면서 자신의 활발하고 적극적인 성격을 보여줄 수 있는 자격증에 면접관들도 더 큰 관심을 보인다는 것.
취업문을 열기 위해 자격증 취득에 매달리는 사람들을 만나러 돌아다닌 뒤 광화문 사무실로 돌아오니 어느덧 컴컴한 밤이 됐다. 하지만 그 시간에도 종로의 어학원과 자격증 학원들은 여전히 불을 밝히고 있다. '증'으로 '꿈'을 살 수밖에 없는 시대 속, 그들은 오늘 하루도 밤늦게까지 바깥세상이 아닌 학원 강의실 속 책상 앞에서 고군분투 중이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320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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