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기로 전세계가 혼란에 빠진 가운데 시중은행들은 재무건전성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후순위채를 선택했다. 당시 금융당국도 만기 5년 이상의 후순위채를 자기자본으로 인정해줬다.
일반적으로 후순위채는 변제순위가 가장 낮지만 채권 발행기관이 파산하지 않으면 만기에 돌려받을 수 있다. 저축은행 사태를 기억한다면 '위험한 상품'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는데, 금융위기 시절 은행에서 발행한 후순위채는 투자자에게 안전하면서도 짭짤한 금리를 제공하는 상품이었다.
변제순위가 밀리지만 은행에서 발행했다는 점에서 안정성이 높았고 금리 또한 3~4%대의 예적금과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게다가 매달 혹은 분기마다 이자를 지급하는 이표채 방식을 사용해 현금흐름까지도 원활하게 하는 쏠쏠한 투자수단이 됐던 것.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5월에는 총 4조1190억원어치의 시중은행 후순위채 만기가 돌아온다. 이 가운데 5월21일 기준으로 2조8278억원이 만기를 맞았다. 6월에도 2조6151억원어치의 채권만기가 예정돼 있으며 이후 12월까지 월 평균 4700억여원의 만기가 돌아온다. 올해 후순위채 만기의 대부분이 5~6월에 집중된 셈이다.
◆ 돌아온 후순위채, 매력은 없다
후순위채가 여전히 매력적인 상품이 될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예전과 지금은 다르다. 최근 우리은행이 차환 발행한 글로벌 후순위채를 살펴보면 최종 발행금리가 연 4.7% 수준으로 떨어졌다. 은행 입장에서는 과거의 고금리상품에 비해 이자부담이 줄어들지만, 투자자로서는 이자소득이 절반으로 뚝 떨어지는 셈이다.
그나마 나오기라도 하면 다행이다. 국내 시중은행들은 이미 지난해 7조2000억원 규모의 후순위채권을 선발행했다. 지난해부터 자기자본비율 기준에 관한 협정(바젤Ⅲ)이 시행되면서 후순위채가 더 이상 보완자본으로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막차를 타고 물량을 쏟아낸 것. 따라서 현 시점에서는 만기가 돌아왔다고 해서 은행들이 후순위채를 새롭게 발행하기를 기대하기 어려운 상태다.
채권시장 전문가들은 은행들이 대규모로 몰리는 후순위채 만기상환분을 일부 단기채로 차환 대응할 것으로 예상한다. 업계에 따르면 현재 시중은행들은 올 5~6월에 집중되는 후순위채 만기상환에 대응해 여유자금을 통한 실제상환에 들어가면서도 일부는 1년짜리 단기 은행채로의 차환을 준비 중이다.
지난 2008년 시중은행이 후순위채를 발행할 당시, 은행 후순위채는 좋은 투자상품이었으나 잘 알려지지 않아 금융자산이 10억원 이상인 슈퍼리치들이 주로 가입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증권업계 관계자는 “당시 가입했던 사람들은 대개 4억원 이상의 자금을 후순위채에 넣어 이자수입으로 생활하려는 은퇴자들과 슈퍼리치들이 많았다”며 “은행 후순위채와 같이 금리가 높고 안정적인 상품을 최근에는 찾기 힘들기 때문에 이들도 새로운 투자처를 찾기 위해 고심하는 중”이라고 설명했다.
채권에 투자했던 사람들은 재 투자처로도 채권을 선호한다. 하지만 업계 관계자들은 쓸만한 채권이 없다고 설명한다. 두산그룹 계열사 채권 가운데 신용등급이 A등급인 채권의 경우 22일자 기준으로 만기가 4년6개월가량 남은 채권의 금리가 5.1%다. 대한항공의 만기가 6개월 남은 채권이 3.50%, 지역개발채권의 5년물이 3.23% 등이다. 은행의 예적금 금리가 낮아지긴 했지만 리스크를 감안하면 별 차이가 없다.
임주혁 한화투자증권 르네상스점 마스터PB는 "현재 금융상품 가운데 2008년 이전에 판매됐던 채권의 수익률을 맞출 만한 상품은 거의 없다"며 "당분간 투자대안이 나오기 힘들 것으로 예측되는 만큼 시장의 추이를 지켜보면서 단기 금융상품에 집중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말했다.
CMA(종합자산관리계좌), MMF(머니마켓펀드), RP(환매조건부채권), MMDA(수시입출식 저축성예금), 특정금전신탁, MMW(머니마켓랩) 등의 단기상품에 가입하고 시장의 변동성이 올 때까지는 조금 더 기다려 보는 것이 좋다는 조언이다.
임 PB는 “유동성이 풍부한 상황에서 투자대안 없이 악순환만 지속되고 있다”며 “다만 일부 자산가들은 최근 정부의 공기업 구조조정정책에 따라 자산가치 상승이 예상되는 한국전력이나 KT 등을 주의깊게 살펴보고 있다”고 귀띔했다.
한 업계 관계자는 후순위채 투자자 가운데 전자단기사채에 가입해 3개월 단위로 자금을 굴리는 경우도 있다고 설명했다. 전자단기사채는 실물이 아닌 전자방식으로 발행되는 1년 미만의 단기채권이다. 실물의 위·변조, 분실과 같은 위험을 제거할 수 있으며 발행자의 입장에서도 발행사무를 간소화해 비용을 줄일 수 있다. 더불어 액면금액이 1억원 이상이라 최소 액면금액이 10억원인 기업어음보다 거래가 수월하다. 이들은 발행사의 신용과 만기를 고려해 문제없이 원금을 받을 수 있도록 신용등급이 A1, A2인 회사채 위주로 운용한다고 설명했다.
도중협 KDB대우증권 WM클래스압구정 PB팀장은 “은퇴한 자산가들은 위험을 싫어하고 안정적이면서도 은행 이상의 금리를 원한다”며 “특히 후순위채 투자자들은 이전에 8%대의 높은 금리를 받은 경험이 있어 최근 4%대의 상대적으로 낮은 금리에 재투자하는 것에 대해 고심 중이다. 이들 중에는 아예 해외로 눈을 돌리는 경우도 많다”고 전했다.
미국 등 선진국의 하이일드펀드는 글로벌 신용평가사인 S&P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국내보다 신용등급이 높고 금리 또한 상대적으로 우수한 경우가 많다. 자산가들은 현재 이쪽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것.
도 팀장은 “자산가들은 공모주펀드에 대해서도 관심이 있다”고 밝혔다. 주식시장이 한동안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다가 최근 들어 상승세를 보이고 있어서다. 게다가 BGF리테일, 삼성SDS 등 소위 ‘대어급’이 올들어 상장했거나 상장을 준비하는 등 증권시장과 더불어 공모주시장이 조금씩 회복의 기미를 보이고 있어 이를 주시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333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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