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을 쇼핑하라!’는 대담한 문구와 함께 한국판 블랙프라이데이가 이달 초부터 시작됐다. 업계와의 충분한 협의나 준비가 없었다는 ‘졸속 추진’ 비판에도 불구하고 백화점과 전통시장 등 꽤 많은 곳에서 한국판 블랙프라이데이 홍보문구가 보인다.

블랙프라이데이가 시작된 10월의 첫주말, 백화점의 실적은 전년 동기대비 30%가량 상승했지만 서민의 발길이 닿는 전통시장 등 동네시장은 오히려 매출이 감소했다는 결과가 보도됐다. 화려한 홍보에도 불구하고 품목·지역·유통업체별로 온도차가 꽤 크게 나타난 것이다.


정부가 얼어붙은 소비를 살리기 위해 한국판 블랙프라이데이란 카드까지 꺼냈지만 경기침체가 이어지면서 고객의 지갑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한국판 블랙프라이데이 행사를 민간기업이 아니라 정부가 나서서 진행했다는 점도 소비활동이 부진한 것을 역으로 보여준다. 경제지표만 봐도 대규모 할인행사로 소비지표가 살아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가계부채 규모는 급증했지만 가처분 소득의 증가세가 둔화되고 1인당 국민소득도 감소세를 보이는 상황에서 소비의 위축은 당연한 결과다.

또 이전에도 소비진작을 위한 대규모 할인행사가 진행된 적이 있어 소비자들이 한국판 블랙프라이데이를 새롭게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지난 8월에는 중국 해외직구족을 겨냥해 싱싱코리아 1탄이 진행됐고 중국의 쇼핑데이인 11월11일을 전후해 싱싱코리아 2탄이 열릴 예정이다. 이쯤 되니 한국이 세일공화국처럼 느껴질 정도다.

◆유통업계, “그래도 세일이 답”

세일시즌 추진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에도 불구 유통업계는 가격 할인행사만큼 소비자를 현혹시킬 만한 마케팅전략이 없다는 데 동의한다. 이제는 경품 추첨이나 화려한 행사를 진행해도 가격을 할인하지 않으면 소비자의 외면을 받는다. 이런 추세는 소비자들의 합리적인 쇼핑문화가 완전히 자리 잡았음을 뜻한다.

경기가 좋고 소득이 늘어나는 추세라면 세일을 하지 않아도 소비가 이뤄진다. 당장 현금이 부족해도 미래에 늘어날 소득에 근거해 실용재 외에도 자동차, 옷, 스마트폰 등 쾌락재의 쇼핑을 늘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고객층이 갈수록 줄면서 가성비가 쇼핑의 최고기준으로 자리 잡았다.


이번 코리아 블랙프라이데이 기간에도 중저가의 합리적인 제품이 인기를 끌었다. 백화점에서 품목별로 판매가 가장 많이 늘어난 것은 여성의류였는데 동일점포에서도 고가라인보다는 중저가라인의 비중이 압도적이었다. 현대백화점의 경우 블랙프라이데이 기간에 전년 동기대비 매출이 27.6% 늘었는데 그중 여성의류 매출이 32%나 증가했다.

‘가격대비 성능’을 뜻하는 가성비를 중요시하는 소비트렌드는 거의 모든 품목에서 감지된다. 스마트폰도 이런 흐름을 찾아볼 수 있다. 미래창조과학부 통계자료에 따르면 이동통신단말장치 유통구조개선에 관한 법률(단통법)이 실시된 이후 프리미엄 스마트폰의 점유율은 하락하고 중저가 스마트폰의 점유율이 크게 늘었다. 지난해 9월만 해도 출고가 70만원 이상의 프리미엄 스마트폰의 점유율은 54.4%였으나 올 8월에는 51.5%로 줄었다. 60만~70만원대 스마트폰은 같은 기간 13.5%에서 9.5%로 줄었고 40만원 이하 중저가라인은 18%에서 28.1%로 가장 크게 늘었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달 SK텔레콤 전용폰으로 출시된 TG 루나폰의 초기 돌풍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루나폰은 최신형 프리미엄 스마트폰의 절반가격인 44만9000원에 출시됐다. 저렴한 가격에 비해 높은 만족도가 입소문을 타면서 초기에 하루 평균 2500대가 팔리는 등 ‘대박폰’의 대열에 올라섰다. 이는 LG·삼성전자가 중저가라인을 더 강화하는 계기가 됐다.

TG앤컴퍼니의 스마트폰 '루나'(LUNA) /사진=뉴스1 허경 기자

자동차시장도 가성비전략이 통하는 건 마찬가지다. 현대·기아차에 압도당하면서 줄곧 한자릿수대 점유율에 머물던 한국지엠의 점유율이 8월에는 11.2%, 9월에는 12.8%로 상승세를 보였다. 기존 모델보다 사양과 성능은 향상시키고 가격은 낮춘 경차 스파크가 초기 돌풍을 일으킨 데 따른 것이다. 또 준대형세단 임팔라는 미국시장보다 가격을 낮춰 출고까지 6개월이나 기다려야 할 정도로 대박행진을 벌였다. 현대차의 아슬란은 물론 기아차의 K7마저 제치면서 중형차분야의 ‘가성비 끝판왕’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미국, 크롬북·우버 등 ‘인기’

가성비를 중시하는 소비트렌드는 국경을 초월한다. 지난해 미국 학교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전자기기에 구글 크롬북이 선정됐다. 지난 2012년 미국 학교 내 사용률이 1%에 불과했던 크롬북은 현재 아이패드 판매량을 넘어섰다. 미국 아이들을 사로잡은 비결은 저렴한 가격이다. 구글 크롬북은 200달러(약 20만원)면 구입이 가능하다. 기능적으로도 훌륭한데 키보드와 본체가 분리돼 태블릿 역할이 가능하고 안드로이드 OS와 각종 애플리케이션를 사용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다. 클라우드 사용이 일반화되면서 별도의 저장장치에 대한 필요성이 줄어든 것도 크롬북의 인기요인 중 하나다.

구글 크롬북은 저렴한 가격과 높은 성능을 바탕으로 미국시장을 독식하고 세계시장을 넘보고 있다. 국내에서도 ‘액티브 X’와의 호환이라는 장벽만 넘는다면 크롬북과 같은 저가형 노트북이 시장을 순식간에 잠식할 가능성이 크다.

트렌드의 변화는 새로운 도전자에겐 기회이지만 기존 업체에겐 엄청난 위기일 수 있다. 품목을 막론하고 가성비를 겨냥하지 못한다면 소비자에게 외면받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새롭게 창업하거나 주식투자에 나설 때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크롬북의 인기는 기존 고용량 하드드라이브나 SSD를 장착한 노트북 제조업체에게는 대형 악재일 수밖에 없다. 심지어 메모리반도체업계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를 내는 애널리스트가 있을 정도로 큰 위협이 될 만하다는 점을 참고하자.

미국의 경우 자동차시장에도 일대 변혁이 불가피하다는 시각이 많다. 자동차 공유를 개념으로 사업을 시작한 우버는 국내에서는 불법이어서 사업이 어려워졌지만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대중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미국 CNBC에 따르면 우버를 사용해본 미국인이 지난해에는 3~4%에 불과했지만 올해 설문조사결과 17%로 급증했다. 응답자 중 22%는 앞으로 자동차구매를 아예 하지 않거나 자동차 구매를 미루겠다고 응답한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합리적인 소비문화와 함께 공유경제가 확산되는 것이 자동차업계에는 악재가 될 수 있다.

이런 가성비 중심의 소비트렌드 변화를 주식투자자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저비용항공사(LCC)를 빼놓을 수 없다. 저비용항공사의 대표주자인 제주항공을 보유한 AK홀딩스, 기업간거래(B2B) 장비렌탈을 기반으로 기업소비자간거래(B2C)시장 진입을 본격적으로 추진 중인 AJ네트웍스, 인터넷 및 모바일쇼핑의 대표주자이자 인터넷전문은행에 대한 기대감이 있는 인터파크홀딩스 등이 관심주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406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