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층 빌딩이 숲을 이루고 쇼핑객으로 붐볐던 명동 거리와 달리 그곳에는 생업을 위해 뛰는 상인들의 치열한 삶의 현장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그렇게 따뜻한 모습이 배어있던 창밖 풍경은 하루가 다르게 변해갔다. 밀레오레, 거평프레야 등 주변 복합쇼핑몰을 중심으로 쇼핑 상권이 형성됐고 거리엔 활기가 돌았다. 하지만 이도 잠시. 세월이 흐르면서 동대문 거리는 다시 시들기 시작했다. 발길 끊긴 쇼핑객, 상가 공실률 30%….
‘시내 면세업’에 느닷없이 도전장을 던진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 지난 9월 두산의 면세점 진출 소식이 공식화되자 업계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두산이 유통을 접고 중공업에 집중해왔기 때문.
◆ 진출 배경 놓고 뒷말… 속내는?
그 배경과 속내를 두고 말들이 돌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다. “박 회장이 대한상의 회장직을 겸임하면서 정치권에서 힘을 실어 줬을 것이다”, “단순 면세업이 황금알을 낳는 사업이기 때문에 뛰어든 것이다”, “주력사업의 부진을 현금창출이 손쉬운 면세점사업으로 만회하려는 의도다”, “이미 정치권에선 두산으로 확정했다” 등의 확인되지 않은 루머가 곳곳에서 흘러나왔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박 회장의 '면세 야망'의 불씨는 ‘쇠락한 동대문 상권’에서 비롯됐음을 알 수 있다. 최근 줄어든 국내쇼핑객의 자리를 중국관광객이 메워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박 회장은 그들을 동대문을 일으킬 ‘희망’으로 보고 시내 면세업에 출사표를 던졌다.
4개 노선이 맞물린 교통의 요지, 동쪽 끝에 위치한 구도심으로서의 높은 개발 가능성, 수만명의 신진 디자이너가 모여 있는 패션의 허브 등 상업 터전을 잘 갖춘 동대문이 ‘면세업’과 맞물린다면 시너지 효과가 클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박 회장과 두산이 동대문에 갖는 의미도 빼놓을 수 없다. 두산그룹의 모태는 지난 1898년 6월 창업주인 매헌 박승직이 종로4가에 설립한 박승직상점. 매헌은 1905년 7월 개설된 동대문시장과 광장시장의 산파역할을 한 인물이다. 이후 두산그룹은 동대문 시장의 맹주로 떠올랐다.
그 생각의 결과는 ‘동대문 미래창조재단’을 출범시키는 데 이른다. 박 회장은 지난달 26일 100억원의 사재를 더해 총 200억원을 출연, 동대문지역 균형발전을 목표로 하는 재단의 탄생을 알렸다.
박 회장은 이 자리에서 “동대문은 우리나라 상업의 불씨가 된 장소이자 두산그룹의 태동이 이뤄진 의미있는 장소”라며 “100년 역사가 넘는 동대문의 터줏대감으로서 오랫동안 생각해 온 동대문 상권의 발전계획을 시내 면세점 유치 노력을 계기로 발현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지역사회의 일원으로서 동대문 상권을 살리는 데 교두보 역할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재단은 민-관-학 협력을 통해 동대문 지역발전을 체계적으로 추진한다는 방침이다. 두산은 운영기획 및 총괄, 재원투자 등을 담당한다. 재단 초대 이사장은 김동호 단국대 석좌교수가 맡았다. 재단사업은 ‘싱크탱크’, ‘마케팅’, ‘브랜드 엑셀러레이터’ 등 크게 세 갈래로 진행될 예정이다.
◆ 최태원과 한판 승부… 동대문 승자는?
박 회장이 동대문에 사활을 걸고 주머닛돈까지 내놓았지만 성공을 예단할 수는 없다. 동대문 상권을 낙점한 곳이 두산만이 아니기 때문. SK그룹도 계열사인 SK네트웍스를 통해 케레스타(옛 거평프레야)에 면세점을 만들겠다고 나섰다.
케레스타는 두산타워와 같은 상권을 공유하고 있는 이웃. SK네트웍스는 무엇보다 ‘워커힐 면세점’을 통해 면세업에서 잔뼈가 굵었다는 강점이 있다. 특히 SK네트웍스는 동대문지역의 최대 문제점으로 꼽히는 ‘교통’ 문제에 자신감을 드러냈다. 케레스타는 두타와 달리 대형 관광버스를 주차할 수 있는 대규모 지상 주차공간을 확보했다.
더욱이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출소로 SK는 면세업 확장에 공격행보를 보이고 있다. 지난 6월 1차 면세대전에서 탈락의 고배를 마신 만큼 연속 실패는 없을 것이라는 포부다.
재계 한 관계자는 “두산의 면세업 도전으로 동대문 상권을 놓고 벌이는 두 대기업 간 싸움이 격화되는 분위기”라며 “더욱 재밌는 것은 이 지역에 두타가 후발주자로 들어오면서 거평프레야는 아예 문을 닫아야 했던 아픈 과거가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후 프레야타운에서 다시 청대문, 다시 케레스타로 이름을 바꾸며 몸부림치는 동안 그곳 상인들은 두타 때문에 망했다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혔다”며 “그런 미운털이 박혀있는 곳을 SK가 낙점했으니 십여년이 지나 두 쇼핑몰의 재대결도 볼 만한 포인트”라고 덧붙였다.
동대문 상권을 두고 맞붙은 박 회장과 최 회장. 누가 승자가 될 것인지, 혹은 둘 다 패자가 될 것인지 업계의 시선이 모이고 있다. 둘 중 하나가 될 경우 타격은 크다. 최 회장 입장에선 면세에 ‘면’도 모르는 두산에게 진 꼴이고 박 회장은 그룹의 자존심과 동대문의 터줏대감이라는 상징성에 큰 상처를 입게 되는 셈이어서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408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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