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사 손실보전을 위한 재정지원 규정이 확정되며 정부와 정유업계 간의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 사진은 서울 서초구 만남의광장 주유소에서 시민들이 주유하고 있는 모습. /사진=뉴시스


정부가 석유 최고가격제 시행에 따른 손실을 원가 기준으로 보전하기로 결정하면서 정유업계의 반발이 커지고 있다. 국제유가 하락으로 정제마진 축소와 재고평가손실 발생 우려가 커지는 가운데, 손실액마저 제대로 보전받지 못할 경우 실적 악화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일각에선 외국계 자본이 지분을 보유한 정유사를 중심으로 투자자-국가 분쟁 해결(ISDS) 등 법적 대응 가능성까지 거론된다.


20일 업계에 따르면 산업통상부는 전날 '석유 판매 가격 최고액 지정에 따른 손실 보전을 위한 재정 지원 규정'(안)을 10일간 행정예고했다. 핵심은 석유 최고가격제 시행으로 인한 정유사들의 손실을 '제품 원가'에 정부가 정한 '적정 마진'을 더해 산정하기로 한 것이다. 생산 원가는 원유 도입비·감가상각비·인건비 등으로 구성된다. 각 정유사가 회계법인의 검증을 거쳐 원가안을 제출하면 '최고액 정산위원회'의 심의를 통해 정부가 보전액을 최종 결정한다.

정유업계가 주장해 온 '기회비용'은 보전액 산정에서 배제됐다. 그동안 정유업계는 원유 도입 시점 및 재고평가 방식이 회사마다 다르고, 원유 결제·보험료·운송비 등이 달러로 이뤄지는 만큼 국제 석유제품 가격을 기준으로 손실 규모를 산정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정부는 국제가격 기준을 적용할 경우 최고가격제가 시행되지 않았을 때를 가정한 기회이익까지 보전 대상에 포함돼 과도한 재정 부담으로 이어질 수 있다며 난색을 표해왔다.


이에 업계 추산치와 실제 손실 보전액 규모에는 큰 차이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정유업계는 제도 시행 기간 누적된 영업손실 및 기회비용이 최대 5조 원에 달한다고 본다. 하지만 양기욱 산업부 산업자원안보실장은 전날 중동전쟁 대응본부 브리핑에서 "4조 2000억 원 예산으로 손실을 보상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추정한다"며 "기업 입장에선 항상 더 많은 이윤을 바라는 것이 당연하지만, 국민의 세금으로 지원하는 정부의 입장과는 괴리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선을 그었다.

업계는 보전 기준 결정은 물론 정부가 공정성 확보를 이유로 정산위원회 명단과 회의 내용을 비공개하기로 한 결정에 난색을 표한다. 정유사들이 제출한 원가 자료를 정산위원회가 어떤 기준으로 인정하거나 조정할지 투명하게 확인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적정 마진 역시 정부 판단에 따라 결정되는 만큼 회의 내용이 공개되지 않을 경우 정유사들이 최종 보전액을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란 지적도 나온다.
정부의 최종 보전액이 정유사의 실제 손실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할 경우 법적 분쟁으로 번질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정부의 최종 보전액과 손실 규모 차이가 클 경우 법적 사진은 양기욱 산업통상자원부 산업자원안보실장. /사진제공=산업통상자원부


정유업계의 불만은 최근 국제유가 하락으로 인한 실적 악화 우려와 맞물리며 고조되고 있다. 정유사는 통상 원유를 수입해 일정 기간 보관한 뒤 정제해 판매한다. 전쟁 기간 공급망 다변화를 시도하며 비싸게 들여온 원유가 막 생산에 투입되기 시작한 상황에서 국제유가가 하락하면 휘발유·경유 등 석유제품 가격도 동반 하락해 정제마진이 크게 축소될 수밖에 없다. 보유 중인 원유와 석유제품의 재고 가치가 떨어지며 대규모 재고평가손실이 발생할 위험도 크다.


실제로 국제유가는 빠르게 하락하는 추세다. 전쟁 발발 이후 배럴당 100달러 선을 넘나들던 두바이유는 미국·이란 간 종전 협상 타결 및 호르무즈 해협 정상화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면서 지난 18일 기준 81.29달러까지 내려왔다. 미국과 이란의 후속 협상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될 경우 추가 하락할 가능성도 높다.

정부의 최종 보전액이 실제 피해 규모에 못 미칠 경우, 해외 자본이 지분을 보유한 기업들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법적 대응이 이뤄질 가능성도 제기된다. 현재 GS칼텍스는 미국 에너지 기업 셰브론이 지분 50%를 보유하고 있으며 에쓰오일은 사우디아라비아 국영 석유기업인 아람코가 최대 주주다. 아람코는 HD현대오일뱅크 지분 17%도 보유하고 있다. 정부 정책으로 인해 발생한 손실을 충분히 보전 받지 못할 경우, 이들 외국계 주주가 주주가치 훼손 문제를 공식적으로 제기할 수 있다.


업계 관계자는 "원가 기준이라는 큰 틀이 정해진 만큼 이제는 어떤 항목을 손실로 인정할지와 적정 마진의 규모가 최대 관건"이라며 "최종 산정액 도출 전까지 정부와의 치열한 줄다리기 협의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