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도 순성(巡城)놀이라는 것이 있었다. 새벽에 도시락을 싸들고 5만9500척(尺)의 전 구간을 돌아 저녁에 귀가했다. 도성의 안팎을 조망하는 것은 세사번뇌에 찌든 심신을 씻고 호연지기까지 길러주는 청량제의 구실을 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현재 서울은 도성을 따라 녹지대가 형성된 생태도시의 면모를 보여주기에 충분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복원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해설은 과거와 현재의 대화다. 수년간 한양도성을 해설한 필자가 생생하게 전하는 도성 이야기를 소개한다. <편집자주>

송월길은 서울복지재단 담장 밑에서 송월2길과 갈라진다. 아래로는 교남뉴타운(경희궁자이)이라는 아파트단지가 들어서서 옛날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거기서부터 월암공원의 언덕이 시작되고 송월2길을 따라가면 월암근린공원 끝자락에 예스런 붉은 벽돌집 한 채가 앞을 가로막는다. 그것이 홍난파(洪蘭坡)의 옛집이다.


서쪽으로는 가파른 계단이며 공원길을 따라 들어가면 곧장 현관이다. 현관문 옆 벽에는 등록문화재 제90호라는 현판이 붙어있다. 집 앞 마당에는 홍난파의 흉상이 서있고 아래 안내판에는 그와 관련한 긴 설명이 쓰여 있다.

◆홍난파, 굴곡의 생애


홍난파 가옥과 흉상. /사진제공=허창무


그의 결혼생활은 순탄치 못했다. 17세 때 결혼해 28세에 첫째 부인과 사별했다. 9년 뒤 37세에 소프라노가수 이대형과 재혼했고 당시 결혼생활을 위해 이 집을 마련했다. 1940년 7월 <여성>에 기고한 ‘암정’(岩庭)이라는 수필을 통해 홍파동 집에 대한 소감을 피력했다. 바위뿐인 집터에 흙을 부어 정원을 만들고 정원 가꾸기에 취미를 들여 일요일이나 일 없는 날에 가위로 나뭇가지를 자르는 즐거움을 말했다. 하지만 새 가정에서의 행복한 결혼생활은 짧았다. 홍난파는 1941년 4월 늑막염이 재발해 8월30일 숨을 거뒀다. 향년 44세였다.
그의 학력과 경력을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식민지시대 지식인들의 발자취를 더듬음으로써 누가 핍박받으면서도애국의 길을 걸었고 누가 시류에 영합해 친일의 길을 걸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다.

홍난파는 경기도 화성 출신으로 작곡가요 바이올린 연주자요, 지휘자였다. 1912년 YMCA중학부를 졸업한 후 한국최초의 음악전문교육기관인 ‘조선정악전습소’ 서양악과에 입학해 성악을 전공했다. 졸업 후 다시 기악과에 입학, 김인식에게 바이올린을 배웠다. 1918년 일본에서 유학하며 우에노음악학교에 입학했고 귀국 후에는 매일신문사 기자생활을 거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도 다녔다. 이후 1926년 일본 도쿄고등음악학원에 편입해 도쿄교향악단(현재 NHK교향악단)의 제1바이올린 연주자로 입단했다.


1929년 졸업 후 귀국해 ‘조선동요100곡집’ 상권을 연악회를 통해 펴냈다. 1931년 조선음악가협회를 결성하고 상무이사를 역임했으며 빅타레코드사의 고문으로 활동했다. 같은해 9월 미국 시카고 셔우드음악학교에서 수학 후 귀국해 이화여전 강사로 활동하며 ‘조선동요100곡집’ 하권을 발간했다. 1937년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교향곡 연주를 지휘했고 곡명은 모차르트교향곡 41번 ‘주피터교향곡’이었다. 1년 뒤 경성음악전문학교 교수로 취임했다. 다양한 이력이다.

최근에는 조선문예회 등 친일단체에서 활동했고 친일성향의 곡과 글을 발표하는 등 그의 친일행위가 문제가 됐다. 이에 난파음악상을 받은 음악가(작곡가 류재준)가 그의 친일행위를 문제 삼아 수상을 거부하기도 했다. 따라서 그가 오로지 민족의 애환을 노래했다는 과잉찬사는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고 본다.

◆베델의 옛 집터


베델 가옥 표지판. /사진제공=허창무


구한말 누구보다 한국을 사랑해 목숨까지 바친 어니스트 베델(Ernest Bethell, 한국명 裵說)의 옛집은 어디로 갔을까. 홍난파와 베델의 집터는 거리가 30m 안팎이다. 친일파의 옛집은 등록문화재로 지정돼 대우받는 반면 애국자의 옛집은 그 자취마저 사라졌다.
베델의 옛집은 홍파동 2-4번지다. 지금은 월암공원에 편입된 지번인데 도성 성곽 바로 아래에 위치한다. 옛 사진을 보면 벽체는 붉은 벽돌을 쌓고 지붕은 한옥으로 올린 절충식 한옥이었다. 이곳이 구한말 배설이 창간한 항일신문 <대한매일신보>의 사옥이자 발행인인 베델의 집이었다. 그 집 일대는 고종황제가 하사한 자리다.

그는 노일전쟁 중인 1904년 3월 영국 런던 신문인 <데일리 크로니클>의 특파원으로 한국에 왔지만 사표를 낸 후 한국 편에 서서 투쟁했다. 그는 일제의 침략 야욕으로 풍전등화의 처지에 놓인 우리 민족에 공감, 1904년 7월18일 민족 항일지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 데일리뉴스>를 창간하고 발행인 겸 편집인이 됐다. 그 신문은 일제의 사전검열을 받지 않는 유일한 신문이었다. 당시 일제와 군사동맹을 맺은 영국인 명의의 신문이었기에 일제의 검열이 미치지 않는 치외법권을 누렸다.

일제 통감부는 그를 회유했으나 거부하자 간첩행위를 했다는 누명을 씌워 그를 6개월 금고형에 처했다. 이어 그를 한국에서 쫓아내려고 동맹국인 영국정부에 압력을 넣어 결국 1907년과 1908년 두번이나 영사재판에 회부했다. 결국 그는 영국 군함에 실려 상해로 이송되고 상해형무소에서 3주간의 금고형을 살았다. 다시 한국에 와서 1909년 5월 심장확장증으로 타계했고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안장됐다.

이후 그의 집은 1924년연희전문학교와 이화여전교수로 있던 안동원씨가 안식교 선교사 리켄트로부터 2500만원을 주고 샀다. 안동원의 아들 안영식도 아버지에 이어 그곳에서 살았다. 안씨 부자는 1971년 베델의 옛집이 기념관이 된다면 시가만 받고 다른 곳으로 이사 가겠다는 의사를 밝혔음에도 정부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베델의 옛집과 그에 관한 기록을 복원할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522호(2018년 1월10~16일)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