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삶의 질 향상을 위한 노동시장 대변혁이 임박했다. 주 52시간 근로제 적용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최저임금의 가파른 상승도 예고됐다. 대대적인 개혁에는 부작용이 있기 마련이다. 당장 정부의 노동시장 개혁안을 바라보는 기업과 근로자의 입장 차이가 크다. <머니S>가 달라지는 노동시장과 기업의 대응, 근로자 입장을 들어봤다. 나아가 선진국 사례를 통해 글로벌 노동시장 트렌드를 살펴봤다.<편집자주>
정부가 새로운 노동정책 추진에 팔을 걷어붙였다. 최저임금 인상부터 주 52시간 근로제 도입까지 ‘일자리 정부’를 표방한 노동정책이 수면 위에 올랐다. 은행권은 주 52시간 근로제 도입에 속도를 내고 있다. 금융업은 ‘근로기준법 개정안’에서 특례업종임을 고려해 시행일이 내년 7월로 연기됐지만 고용노동부가 조기도입을 촉구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사진=뉴시스 박진희 기자 최근 은행연합회는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과 주 52시간 근무제 조기 도입을 위한 논의에 들어갔다. 노사는 근로단축을 적용하지 않는 특수직군 선별 작업을 진행 중이며 늦어도 이달 안에 합의안을 도출할 예정이다. ◆"스타트 끊어라" 특례업종 선제도입 이유
은행이 52시간 근로제 도입에 총대를 멘 이유는 산업계에 일으킬 파급효과가 크기 때문이다. 은행은 기업 경영의 혈액과 같은 자금순환을 맡는다. 은행 업무시간을 줄이면 자금거래 시간이 짧아지고 자연스럽게 산업계의 근로시간 단축을 유도할 수 있다.
과거부터 은행이 정부의 노동정책을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맡은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주5일 근무제’는 은행에서 가장 먼저 시작했다. 2002년 7월부터 토요일 은행 지점이 문을 닫았고 2년 후 정부가 주5일제를 시행했다.
당시 전국경제인연합회와 대한상공회의소, 한국경영자총협회 등 경제단체는 “은행이 주5일제를 도입해 기업 활동에 애로사항이 많다”며 “토요일 근무하는 외국계 은행이나 제2금융회사에 여신과 수신을 몰아주자”고 나서는 등 갈등을 빚었다.
하지만 은행이 주5일제 영업을 관철하면서 결국 토요일 결제분을 하루 앞당기는 기업이 늘었고 정부의 주5일제 시행에 잡음이 사라졌다.
은행의 노동정책 효과는 영업시간 조정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2009년 4월 은행은 영업시간을 오전 9시30분~오후 4시30분에서 오전 9시~오후4시로 조정했다. 스마트폰이 보편화되지 않았던 당시에는 많은 직장인이 잔금처리를 위해 서둘러 영업점을 방문했다. 은행이 폐점시간을 30분 앞당기자 기업의 자금거래도 30분 빨라진 것이다.
정부가 52시간 근무제의 첨병으로 은행을 내세우는 이면에는 근로기준법 개정에 대한 강력한 의지가 깔려있다.
먼저 정부의 예산책정과 경영평가를 받는 국책은행이 주 52시간 근로제 도입에 나섰다. 기업은행은 지난 3월부터 태스크포스팀(TFT)을 꾸리고 내달부터 근로시간을 단축할 계획이다. 수출입은행도 하반기부터 근로시간을 줄인다. 특수은행인 NH농협은행은 사무소별 근무시간 실태조사 등을 통해 조기도입 여부를 검토하고 있다.
시중은행은 은행장으로 구성된 사용자협의회와 금융노조가 근로시간 단축에 합의안을 내놓으면 공동 대응할 방침이다. 김태영 은행연합회장은 “사용자협의회가 금융노조와 주 52시간 근무제를 논의한 결과 조기도입에 공감했다”며 “근로시간 단축 이후 생길 문제에 대해 논의 중이며 실무진과 임원진이 협의해 이견을 좁힐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 코드맞추기 정책, 속도 조절해야
전문가들은 은행의 52시간 근로제 도입에 긍정적인 평가를 내놓으면서 속도 조절을 주문한다. 은행의 근로시간 단축제도가 연착륙하려면 후속 대응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주장이다.
특히 52시간제 도입이 어려운 직원의 형평성 논란을 해결해야 한다. 은행권은 인사·경영·자금관리·예산·KPI·결산·여신심사·경영계획·일반기획·연수원·안전관리실·정보기술(IT)·자금관리·물류배송·기관영업·어음관리·공항 및 공단 특수점포 등 20개 직무를 근로시간 단축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금융노조 측은 “특정직군만 주 52시간 일하는 반쪽짜리 제도가 될 수 있다”며 사측이 지정한 예외직무를 줄여야 한다고 맞선다.
해외에선 기업이 줄어든 근로시간에 대응할 수 있도록 최대 근로시간 단축 한도를 자율 설정하는 ‘탄력적 근로시간제’를 운영 중이다. 노사가 재량권을 갖고 사업장마다 제도를 유연하게 적용하는 방식이다.
미국과 유럽은 이른바 ‘화이트칼라 이그젬션’ 특례업종을 도입하고 있다. 일정수준 이상 연봉을 받는 사무직 근로자를 근로단축 규제에서 제외하는 제도다. 근로시간과 임금관계가 모호한 비생산직 분야에 주로 적용된다. 서병호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은행은 근로시간 단축을 시행하기 전에 직무특성에 따라 적용 예외를 검토하는 게 바람직하다”면서 “노사 합의가 원칙이기 때문에 심도있는 대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52시간 근무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복지 마련도 필요하다. 최근 시중은행은 직원의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 확산을 위해 저녁 6시에 컴퓨터 전원을 내리는 PC오프제, 출퇴근 시간이 자유로운 유연근무제를 도입했다. 하지만 희망퇴직에 따른 직원 수 감소로 업무가 늘면서 새벽부터 출근하는 직원이 눈에 띄게 늘었다.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설익은 정책의 부작용이다.
이밖에 줄어든 근로시간을 메울 수 있는 인력확보도 시급하다. 시중은행은 올 하반기 2600명 이상을 신규 채용할 계획이다. 지난해보다 25% 늘어난 규모다. 다만 핀테크 도입으로 은행원의 역할이 줄어 정부의 코드 맞추기 인력충원이 얼마나 지속될지 의문이다. 더욱이 젊은 은행원을 뽑기 위해 희망퇴직을 늘리는 일자리정책은 비난을 받기 쉽다.
성태윤 연세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는 “근로자의 일자리와 근로시간은 상관관계를 갖는다”며 “줄어든 근로시간만큼 인력을 늘릴 수 있는지 살펴보고 근로단축을 단계적으로 도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543호(2018년 6월6~12일)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