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신성일이 지난달 4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 전당에서 열린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개막식에 참석해 레드카펫을 밟고 있는 모습. /사진=뉴스1
배우 신성일(81)이 4일 오전 2시30분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지난해 6월 폐암 3기 판정을 받은 후 전남의 한 요양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왔으나 끝내 병마를 이기지 못했다. 한국영화계의 큰 별이 지며 그가 남긴 업적을 기억하는 이들의 애도 물결이 이어지고 있다.
신성일은 한국영화사의 상징과도 같은 배우다. 1960년 영화 ‘로맨스 빠빠’로 데뷔한 후 총 508편의 영화에 출연해 한국영화 발전에 기여했다. 1960∼1970년대 충무로 최고의 미남, 톱스타로 군림했으며 1964년에는 배우 엄앵란과 결혼해 ‘세기의 커플’로 주목받았다.

배우가 되기 전 신성일은 같은 시대를 살아온 대다수 서민과 같인 순탄치 못한 유·청년기를 보냈다. 1937년 대구에서 태어나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경북도청 공무원인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어릴 적부터 걸출한 용모에 공부도 잘 하는 모범생이었지만 공부에만 전념할 환경이 아니었다.


대구 수창초등학교·영덕중·경북고를 거쳐 서울대 진학을 꿈꿨으나 어머니가 운영하던 계가 깨지면서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 고2때 빚쟁이들을 피해 서울로 무작정 올라왔다. 서울대 상대에 원서를 넣었으나 떨어졌고 이후 방황하다 청계천에서 호떡 장사를 하기도 했다.

신성일은 재수를 하던 중 우연히 한국배우전문학원에 들어갔고 1957년 신상옥(1926~2006) 감독이 운영하던 신필름 배우 모집에서 높은 경쟁률을 뚫고 전속배우가 됐다. 이후부터 우리가 아는 배우 신성일의 화려한 삶이 시작됐다.

1960년 신 감독의 영화 ‘로맨스 빠빠’로 데뷔한 이후 ‘아낌없이 주련다’(1962년), ‘가정교사’(1963년), ‘청춘교실’(1963년)로 스타로 등극했다. 1964년 김기덕(1930~2017) 감독의 ‘맨발의 청춘’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뒤 탄탄대로를 걸었다.


1979년 한국영화배우협회 회장을 지낸 고인은 영화 제작자·감독으로도 활동했다. 그가 제작·감독한 작품은 ‘연애교실’(1971년), ‘어느 사랑의 이야기’(1971년),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1971년) 등이다.

신성일의 본명은 강신영이다. 하지만 국회의원에 출마하면서 강신성일로 개명했다. 1981년 11대 총선 서울 용산·마포구에 한국국민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2위로 낙선했다. 1996년 15대 총선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대구 동구 갑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뒤 2000년 16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대구 동구에서 당선돼 의정활동을 했다.

정치인으로 변신한 뒤에도 영화와 관련된 일에 앞장섰다. 2002년 춘사나운규기념사업회 회장, 2003~2005년 한국영화배우협회 이사장을 지냈다.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DIMF) 이사장, 계명대학교 특임교수도 역임했다.

청룡영화상 인기상(1963~1973년), 아시아 영화제 남우조연상(1979), 대종상영화제 남우주연상(1968년), 대종상영화제 남우조연상(1986년), 대종상영화제 남우주연상(1990년), 대종상영화제 남우조연상(1994년), 대종상영화제 영화발전공로상(2004년), 제28회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특별공로예술가상(2008년), 제17회 부일영화상 영화발전공로상(2008년), 제8회 대한민국영화대상 공로상(2010년), 제47회 백상예술대상 공로상(2011년), 제33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공로상(2013년), 제37회 황금촬영상 공로상(2017년), 한국영화를 빛낸 스타상 공로상(2017년) 등을 받았다.

고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장례는 영화인장으로 진행된다. 한국영화배우협회와 한국영화인총연압회 등 영화계 관계자들이 유족과 영화인장의 구체적 절차를 놓고 협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신영균 한국영화배우협회 명예회장과 기타 협회 임원진, 영화감독 등으로 공동장례위원회가 구성된다.

고인의 유족으로는 부인 엄앵란, 아들 강석현씨, 딸 강경아·수화씨가 있으며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