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과 미국 정상이 두번째로 만나는 곳㊤

2차 북미정상회담이 오는 27~28일까지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다. 이후 하노이가 연일 뉴스에 오르내리며 관심을 모으고 있다. 베트남은 남북 분단 역사를 극복하고 통일 베트남이라는 현대사를 써 우리에게는 부러움이 큰 나라이다. 그래서 2차 북미정상회담 장소가 베트남인 것이 더욱 반갑다. 북미 정상이 하노이에서 만나 지혜롭게 갈등을 넘어 세계평화로 가는 역사를 써주길 기대한다. 북미정상회담에 앞서 하노이를 소개한다. [편집자주]


하노이 거리 풍경. /사진=양소희 여행작가
나에게 있어서 베트남은 영화 속에서 본 베트남 그리고 TV에서 뉴스로 접한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팀의 박항서 감독이 전부였다. 나를 포함한 한국인들은 베트남에 대해 얼마나 정확하게 알고 있는 걸까. 2차 북미정상회담이 열리는 하노이를 여행하면서 편견으로 무지로 무관심으로 잘 몰랐던 베트남을 공부하는 좋은 기회가 됐다.
베트남을 짧은 시간에 쉽게 이해하는 데 하노이만큼 좋은 도시도 없다. 글로 소개하고 있는 호찌민의 유적지, 못꼿사원, 문묘, 호안끼엠호수, 하노이의 구도심 거리 이외에 역사박물관, 여성박물관, 호아로수용소, 탕롱제국의 왕궁, 탕롱 수상인형극, 성 요셉성당, 꽌쯔사를 필수 여행지로 추천한다. 적어도 사흘 이상은 머물러야 하노이를 제대로 돌아 볼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베트남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이 개인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모두 내려놓고 열린 마음으로 베트남을 바라보는 하노이여행이 되길 바란다.

장대 좌우에 물건을 메고 팔러다니는 하노이 시민. /사진=양소희 여행작가

◆떠오르는 용이라 불리던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는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4시간 반이 걸리며 시차는 우리나라보다 2시간 느리다. 하노이는 과거 베트남의 첫 번째 리(李)왕조(1009~1225)에 의해 탕롱(昇龍, 떠오르는 용이라는 뜻)으로 불리면서 수도가 된 후 현재까지 천여년 동안 수도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1831년에 하노이(河內, 두 강 사이에 있는 도시라는 뜻)로 이름이 바뀐 후 1873년 프랑스에 점령됐을 때는 인도차이나 반도 전체의 중심도시이기도 했다. ‘베트남의 모든 권력은 하노이에서 나온다’고 할 정도로 하노이는 오늘도 베트남의 제1의 도시로 당당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호찌민의 작전본부. /사진=양소희 여행작가

◆베트남의 역사는 외침의 역사
베트남은 지리적으로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어 기원전부터 중국의 침략을 반복해 받았으나 끈질기게 싸워 독립을 지켰다. 그 중 100만 몽골군과의 3차에 걸친 전쟁은 결사항전으로 싸워 승리하면서 베트남의 역사에 큰 획을 그었다. 놀랍게도 원나라 역사에서 가장 강성했던 쿠빌라이 칸의 대군과도 맞서 싸워 전멸시킨 나라가 베트남이다.


탕롱제국 황궁. /사진=양소희 여행작가
근대 이후에는 독일, 포르투갈, 프랑스, 미국 등 서구 제국주의의 침입을 받았지만 역시나 모두 패배시켰다. 특히 초대강국 미국과 맞서 싸워 승리하면서 불굴의 민족으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전세계에서 군사력이 가장 강력한 나라들과 무력으로 싸워 모든 전쟁에서 이긴 유일한 나라가 베트남인 것이다. 그래서 베트남의 역사에는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민족을 구한 영웅들이 수없이 많이 등장한다. 베트남 국민들은 그들의 이름을 잊지 않으려고 거리 곳곳에 영웅이름으로 거리이름을 지어 전국의 거리가 역사적 영웅 이야기로 가득하다.
세계 최강국 때문에 고난을 받은 베트남이지만 인도차이나 반도 지역 내에서는 수백년 동안 남진하는 침략 과정을 통해 지금의 베트남 영토가 완성됐다. 중부 베트남은 이전에는 짬빠왕국이었고 남부 베트남은 크메르민족의 땅이었다. 베트남은 인도차이나 반도에 있는 나라들에게는 가장 두려운 맹주(盟主)이다.

◆민족영웅 호아저씨, 호찌민(胡志明)

바틴광장 호찌민 묘. /사진=양소희 여행작가
베트남을 알고 싶다면 제일 먼저 가봐야 할 곳은 평생을 조국에 바친 위대한 지도자 호찌민의 유적지이다. 베트남 사람들은 호찌민을 호아저씨라고 부르는데 존경과 친밀함의 표현으로 베트남 사람들이 얼마나 그를 사랑하는 지 알 수 있는 표현이다. 호찌민은 적군의 폐타이어로 만든 샌달을 신었으며 일상의 사진은 초라할 정도로 검소한 옷을 입었다. 그는 베트남은 독립할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전쟁 기간 중에 5만명의 청년들을 외국에 유학시키며 베트남의 미래를 준비했다. 안타깝게도 통일이 되기 6년 전 하노이의 집무실에서 눈을 감았다.

호찌민 영묘가 자리 잡고 있는 바딘광장은 1945년 8월혁명 후 9월2일 호찌민이 베트남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한 곳이다. 바딘광장에 우뚝 자리 잡은 호찌민 영묘는 1969년 사망한 호찌민의 시신을 방부 처리하여 생존의 모습을 대중에게 공개하고 있다. 사진 촬영은 안 되며 단정한 옷차림을 입어야 입장 가능하다. 호찌민은 생전에 장례식을 크게 하지 말고 소박하게 화장하라고 했으며 동상도 세우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레닌, 스탈린, 모택동 같이 엄청난 비용을 들여 시신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통일된 베트남은 많은 난관이 있었다. 미국이 1964년 통킹만 사건을 빌미로 베트남 전쟁에 직접 개입하면서 어마어마한 전쟁지옥이 시작됐다. 1973년 미군이 베트남 땅에서 완전히 철수 한 후 사이공이 1975년에 함락돼 베트남이 통일되기까지 300만명의 사상자와 200만~500만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베트남의 여성들은 독립을 위해 군인으로 남자 못지 않은 투쟁을 했다. /사진=양소희 여행작가
영화를 통해 이 전쟁을 접한 사람들은 대부분 미국과의 전쟁이라고만 알고 있지만 진실은 베트남이 남북으로 나눠져 20년 동안 싸우면서 벌인 동족상잔의 비극이기도 했다. 통일정부는 전쟁이 파괴한 교통로와 시설물들 그리고 고엽제의 오염 등을 외세의 지원 없이 스스로 재건해야 했다. 민중들은 전쟁으로 엄청난 피를 흘리며 살아남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고통을 극복해야 했다.
전쟁은 끝났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은 사라지지 않는다. /사진=양소희 여행작가
베트남은 지리적으로 국토의 모양이 매우 길어 상호교류에 있어서 공간적인 거리감이 커서 하나 된 베트남으로 가는 길을 더디게 했다. 하노이에서 호찌민까지는 1700㎞이며 기차를 타면 하루하고도 8시간 정도를 가야 도착한다. 남과 북의 다른 사고방식, 반감, 원한 등 통일된 베트남은 넘어야 할 과제가 많았다. 그래서 베트남에게 호찌민이 없으면 통일 베트남은 구심점을 찾지 못해 나침반과 방향타가 없는 배에서 항해하는 것과 같았을 것이다.
민족영웅 호찌민은 죽었지만 남북 모두가 존경하는 그는 눈을 감지 못하고 여전히 살아있어야만 하는 이유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호찌민 유적지를 돌아보며 그가 독립과 통일을 향해 거침없이 걸었던 고난의 길을 알게 되었다. 그의 유언대로 ‘이제는 그를 조용히 보내드리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시대에 맞는 평화, 번영, 민족화해를 위해 진짜 살아있는 영웅이 베트남에 나타나기를 바라면서.

못꼿사원. /사진=양소희 여행작가
호찌민의 유적지는 호찌민 영묘가 있는 광장 중심으로 왼편에 호찌민박물관이 있고 오른편에 호찌민의 집이 있다. 호찌민박물관 입구 오른쪽에는 베트남 국보 1호인 못꼿사원(一柱寺)이 있다. 호찌민박물관과 어울리지 않는 듯 보이는 관광지이지만 인기가 높은 듯 사람들이 가득하다. 못꼿사원은 연못에 한개의 원형 돌기둥인 주춧돌을 세우고 그 위에 정자를 올려 마치 꽃이 핀 연꽃모양을 연상하게 한다.
계단이 있어 누구나 정자에 올라가 볼 수 있다. 연꽃은 베트남의 국화(國花)이기도 하며 불교에서는 부처의 탄생을 알리는 꽃이다. 리(李)왕조의 리따이톤(李太宗)은 연꽃 위에 앉은 관음보살이 아들을 건네주는 꿈을 꾼 후 아들을 얻게 돼 1049년 원주탑을 지었다고 전한다. 못꼿사원이 위치한 불교 사찰에서는 장수와 복을 기원하는 베트남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베트남에서 불교는 시련의 역사를 통과 하면서 민족을 각성시켰으며 사회사업을 목표로 하면서 스스로 개혁을 거듭해 왔다.

☞글·사진=양소희 여행작가

저서로는 'ENJOY 타이완', '화천에서 놀자', '담양여행', '인천섬여행', '부산에 반하다' 등이 있다. 특히 강연, 방송, 국내외 여행 콘텐츠 개발 등 여행관련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