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태안 태배길을 걷다
이태백이 노래한 빼어난 절경

개미 목처럼 가늘다는 개목항.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태안의 바다는 동해 바다처럼 맑고 푸르다. 태안의 겨울바다가 좋아 겨울만 되면 두세번씩 태안을 걷는다. 학암포에서 영목항까지 97㎞에 걸쳐 펼쳐진 해변길을 대부분 한겨울에 걸었다. 신두리 해안사구에서, 꽃지에서, 그리고 바람아래해변에서 느끼는 감흥을 잊을 수가 없다. 겨울이면 어김없이 나를 부르는 곳이 태안이다.
충남 태안은 2007년 커다란 인재를 입었다. 온 바다가 기름에 덮였다. 새들은 기름덩이에 싸여 죽어갔다. 악취는 바다를 뒤집어 삼켰다. 인간의 잘못으로 바다는 그렇게 죽어갔다. 암담해 끝이 안보일 것만 같았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나섰다. 헝겊과 양동이를 들고 악취 나는 돌덩이와 모래를 닦아내기 시작했다. 그들의 노력으로 영원히 회복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태안의 바다가 옥빛 생명의 바다로 돌아왔다.

의항해변 풍경.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개미목처럼 가는 의항항(개목항)
의항항(개목항)은 신두리 해안사구와 마주한 작은 항구이다. 의항항(蟻項港)은 개미 의(蟻)와 목 항(項) 자를 땄는데 풀이하면 개미목이다. 다른 말로 개목항이라 부르는 이곳은 오늘 길의 끝 지점인 의항해변과는 500m도 안 되는 좁은 지역이다. 그래서 개미의 목처럼 가늘다 해서 개목항이다.

이곳은 번잡하지 않고 소박한 전형적인 작은 포구마을이다. 자주 이곳에 들르다보니 변화가 하나씩 눈에 뜨인다. 사람들을 맞이하는 새로 지은 집이며 별장이 들어서고 있다. 지금 같은 겨울이 아니면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곳으로 변한 느낌이다. 그래서 사람이 많지 않은 겨울의 태안을 좋아한다.


소나무 사이로 보이는 태안 바다 풍경.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해변을 따라 걷다가 이내 마을로 접어든다. 마을 사이로 난 길은 언덕이 가로 막는다. 언덕을 넘어서자 송림사이로 푸른 해안이 반긴다. 해안에 다가갈수록 차가운 바닷바람이 마음을 헤집어 놓는다. 오전에 다녀온 건너편 신두리 해안사구가 가깝게 보인다. 직선거리로는 얼마 되진 않지만 원형의 만을 한바퀴 돌아온 것이다. 오른쪽, 바다 위로 이어진 구조물이 독특하다. 아마도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을 위한 곳인 듯하다.
◆모래에 마음을 새기다

해변으로 내려선다. 찰싹거리는 파도는 포말로 부서진다. 하얗게 밀려왔다가 사라지자 그 자리엔 수억년 동안 물과 바람에 마모된 작은 돌들이 물빛을 머금고 반짝거린다. 문득 동심이 들어 힘껏 물수제비를 뜬다. 내 손을 떠난 돌들은 물을 대여섯번 수제비를 뜨더니 이내 팽그르르 바다에 잠긴다.

고즈넉한 신너루해변.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신너루 해변 모래는 적당한 깊이로 발걸음을 잡아놓는다. 걸어온 발걸음은 파도에 다시 흔적을 감춘다. 한때는 기름 유출로 황폐화된 이곳을 다시 살아나게 한 영웅들에게 감사한 마음이 짙게 든다. 그때는 모두가 영웅이었다. 특별해서가 아닌 그저 어디에나 있을 우리들이 이 해변을 살린 것이다. 때문에 바다를 바라보는 마음이 벅차다.
◆안태배해변과 태배전망대

아름다운 신너루 해안의 끝은 해벽이다. 밀물이면 해벽을 타고 안태배해변으로 바로 걸어갈 수 있다. 하지만 물이 들어 있어 나무데크를 따라 해벽 구간을 통과하기로 한다. 조금 오르면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조그마한 전망대다.

안태배해변 풍경.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멀리 신두리 해안사구가 눈에 잡힐 듯 가깝다. 태곳적 인간의 셈법으론 헤아릴 수 없는 오래전부터, 바람은 모래를 조금씩 밀어 올려 거대한 모래언덕을 만들었다. 수많은 이들이 태안의 바다를 지키기 위해 이곳을 셀 수 없이 다녔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위대함도 장구한 세월과 자연의 힘 못지않음을 되새겨본다.
하얀 안태배해변이 눈에 들어온다. 해변 뒤에는 소나무 방풍림이 있어 야영하기에는 제격이다. 안태배해변으로 내려섰다. 밀려들어왔다가 쓸려 내려가는 파도의 철썩임과 멀리 평평하게 펼쳐진 수면의 고요함. 이곳에 오면 늘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

태배전망대.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태배전망대에 올랐다. 태배전망대에는 기름 제거에 나섰던 봉사자들의 고마움을 담아 조성한 전시관이 있다. 당시 방제에 사용했던 도구와 봉사자들의 활동사진을 전시했는데 겨울이어서인지 아쉽게도 문이 닫혀 있다.
태배전망대에서 사방을 둘러봐도 온 가득 바다다. 옥빛의 바다와 섬들의 조화가 아름답기만 하다. 멀리 바라보니 작은 섬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다. 나라를 지킨 7개의 섬이라고 한다. 모두 형제지간인 칠뱅이섬이다.

큰재산 오르는 길에서 바라본 구름포해변.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해안은 하얀 모래사장과 들쑥날쑥한 회색빛 해벽의 조화가 아름답다. 난데없는 이태백의 호출도 그래서인가보다. 이태백이 조선 땅 태안의 빼어난 경치에 빠져 놀다갔다는 과장이 즐겁다. 그만큼 태배길의 경치는 빼어나다.
태백산(태배산)을 지나 큰재산을 오른다. 그리 높지 않은 얕은 산이지만 바다를 조망하면서 오르니 높은 산 오르는 것처럼 벅차다. 큰재산 발아래로 보이는 널찍한 해변은 하얀 포말에 마치 구름이 뭉실뭉실 피어오르는 것 같다. 그래서 구름포(雲浦)해변인가보다. 탁 트인 해변과 끝 모르게 펼쳐진 바다 풍광이 그저 시원하다.

의항해변으로 내려오다 만난 이태백의 시비.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이태백이 흠모한 절경
큰재산을 지나 의항해변으로 내려오다 태배길의 이유가 되는 이백의 시비를 만났다. 태안의 빼어난 절경에 빠져 경치에 취해 지내다가 이런 오언시를 남겼다고 한다.

先生何日去(선생하일거) 선생이 어느 날에 다녀갔는지
後輩探景還(후배탐경환) 뒤따르는 문생이 절경을 찾아 돌아온다
三月鵑花笑(삼월견화소) 삼월의 진달래꽃은 활짝 피어나고
春風滿雲山(춘풍만운산) 봄바람은 구름 낀 산에 가득하구나

이태백이 지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태안의 경치에 반한 누군가가 지어놓고 이태백의 이름을 빌렸으리라. 계절과는 맞지 않지만 구구절절 이곳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화영섬과 독살.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의항해변에 다다르자 먼저 화영섬이 반긴다. 섬은 크지 않고 작지만 서풍이 거칠게 불어올 때 의항해변을 의연히 지키는 파수 역할을 하는 듯 해변의 끝에서 든든하다. 지명 유래가 재밌다. 조선으로 들어오는 사신들이 풍랑을 만나 이곳으로 들어오다 마주친 섬이어서 환영한다는 뜻으로 ‘환영섬’이라고 했다가 ‘화영섬’으로 변했다는 것.
서풍은 넓은 해변으로 파도를 밀어낸다. 고운 포말은 걷는 자의 발걸음을 사정없이 잡아당긴다. 파도는 안쪽으로 둥근 곡선을 이루며 자꾸 안으로 파고든다. 동해의 집어삼킬 듯 몰아치는 바다와 달리 태안의 바다는 어머니의 부드러운 품안 같다. 파도가 발아래 스치듯 다가와도 한참을 머물렀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625호(2019년 12월31일~2020년 1월6일)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