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레어, 라디컷 제품사진./사진=각사
정부·제약사 ‘환자와 약값 사이 힘겨루기’
신속 급여등재·기금마련 등 접근성 높여야
혁신 신약에 제값을 주지 않는 국내 건강보험시스템 때문에 애꿎은 환자만 피해를 보고 있다. 글로벌제약사에 이어 국내 제약사도 건강보험공단과 신약 협상을 포기하는 ‘코리아패싱’ 현상이 심해지고 있어서다. 까다로운 급여화 절차 때문에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자 제약사들이 한국에 신약 출시를 고려하지 않거나 건강보험 급여 신청을 철회하는 경우가 많다. 이에 건강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면서 비싼 약값을 ‘울며 겨자먹기’로 내야 하는 환자들의 치료비 부담만 높아지고 있다.

◆‘약값 더 받고’… 코리아패싱


관련업계에 따르면 국내 환자들은 알레르기성 천식‧만성두드러기치료제 ‘졸레어’ 주사를 맞을 때 건강보험 혜택을 받지 못한다. 졸레어를 판매‧개발한 다국적제약사 제넨티크와 노바티스가 이 약을 국내 건강보험 항목에 올리려던 계획을 철회했기 때문이다.

환자들은 졸레어 관련 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 만큼 실망감도 컸다. 졸레어는 2018년 기준 글로벌 매출 3조3000억원을 기록한 블록버스터 제품으로 미국 등 제약선진국에서는 널리 쓰이고 있으나 한국환자들은 문턱이 높다. 매회 약값 60만원을 지불해야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제약사가 한국에서 의약품을 판매하기 전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약제급여평가위원회에서 약가를 협상한다. 하지만 공단과 노바티스는 약가에 대한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제약업계 관계자는 “한국은 단일 건강보험제도를 운영하므로 건보공단의 구매력은 상당히 높지만 그만큼 신약 가격을 매우 보수적으로 접근한다”며 “다국적제약사와 건보공단 간 힘겨루기에 환자만 피해를 본다”고 지적했다.

중국 보건당국은 졸레어 약값을 정하기 위한 참조국으로 한국을 선정하자 노바티스는 한국과 협상을 포기했다. 한국시장에 진입하는 대신 중국에서 적절한 약값을 받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으로 해석된다. 한국에서 약값을 낮춰 받으면 중국 약값도 낮아질 수밖에 없자 구매력이 20배 큰 중국시장을 선택한 것이다. 이에 중국인은 한국과 달리 졸레어 처방 시 보험 혜택을 받는다.

미쓰비시다나베파마코리아의 루게릭치료제 ‘라디컷’도 마찬가지다. 이 회사는 지난해 6월 국내 건강보험 급여 등재
계획을 철회했다. 회사는 “국내외 약값 기준의 견해 차이”를 급여 철회 이유로 들었지만 단순 약가 문제가 아닌 한국보다 더 큰 시장에서 약값을 높게 받기 위한 전략적 조치라는 것이 알려지며 비난에 직면했다.

제약업계는 미쓰비시다나베가 라디컷 급여를 철회한 이유에 대해 “의약품 가격을 가장 높게 쳐주는 캐나다에서 한국의 약가를 참조하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우리나라와 동시에 약값 산정절차를 진행 중인 캐나다에서 한국 약가를 참조하겠다고 밝혔다”며 “미쓰비시다나베는 캐나다 진입을 위해 한국 등재 철회를 결정, 정부에 통보한 것”이라고 말했다.

미쓰비시다나베가 라디컷 급여를 철회하면서 한국 루게릭환자들은 라디컷 약값으로 매달 150만원씩 부담해야 한다. 루게릭치료로 보건당국의 승인을 받은 의약품은 라디컷 외 1종인 만큼 치료수요가 높았다는 평가다. 현재 라디컷은 루게릭병을 적응증으로 미국을 비롯한 캐나다, 스위스, 일본 등에서 품목허가를 받아 널리 사용 중이다.

암환자 치료에 널리 활용되는 면역관문억제제도 마찬가지다. 한국 폐암환자들은 해외환자들보다 BMS의 옵디보, MSD의 키투르다 등을 쓰는 데 차질이 많다. 건강보험 약가 협상이 난항을 겪고 있어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75% 이상이 폐암환자 첫 치료제로 키트루다를 쓸 때 건강보험 혜택을 주는 반면 한국환자는 아직 혜택을 받지 못한다.
./사진=식약처
◆국내도 한국 임상 ‘글쎄요’
주목해야 할 점은 코리아패싱이 비단 다국적제약사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국내 바이오기업을 중심으로 이 같은 현상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미국 컬럼비아대 연구에 의하면 한국의 신약 접근성은 OECD 31개국 가운데 19위에 그쳤다.

브릿지바이오테라퓨틱스‧SK바이오팜 등 다수의 바이오기업들이 한국 대신 미국에서 임상시험에 착수했거나 진행한다. 신약에 대한 가치를 온전하게 인정받으려면 한국보다 미국에서 시작하는 게 좋다는 판단에서다. 신약허가를 신청하는데 드는 비용은 FDA 기준 약 30억원으로 식약처(700만원)의 400배에 달하지만 감당하겠다고 입을 모은다.

최근 브릿지바이오가 국내 바이오벤처 사상 처음으로 1조5000억원 규모의 기술수출에 성공한 신약후보물질 ‘BBT-877’은 신약개발에 성공하더라도 국내서 곧바로 처방할 수 없다. 브릿지바이오가 임상1상 시험 허가를 식약처 대신 FDA에서 받았기 때문이다.

뇌전증신약 ‘엑스코프리’로 국내 외의 뜨거운 관심을 받은 SK바이오팜도 한국 출시에 대해 말을 아꼈다. FDA 품목허가 승인을 앞둔 SK바이오팜의 뇌전증치료제 세노바메이트는 국내에서 아직 임상1상도 마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SK바이오팜 관계자는 “식약처 허가를 위해 현재 진행 중인 별도의 임상시험은 없다”며 “한국 출시 일정은 답변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에 보건복지부는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한정된 건보 재정으로 비용 효과성과 형평성을 따질 수밖에 없을 뿐더러 회사가 급여신청을 철회하면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는 이유에서다. 복지부 관계자는 “외부적으로 환자 우선이라고 얘기하면서 환자 우선이 아닌 태도를 취하고 있는 기업들이 많다. 현재 상황에 대해 깊이 있는 대화가 오고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힘겨루기 싸움에 중증 환자들은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암 환자단체 관계자는 “생명의 촌각을 다투는 중증 환자들은 당장 필요한 약을 쓸 수 없는 현실에 놓여 있다. 건강보험료와 세금을 내는 한국 모든 국민이 제한없이 신속하게 혁신신약 치료에 접근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길 바란다”며 “신속 급여등재(패스트트랙)나 항암제 기금 마련 등 신약의 환자 접근성을 높이는 제도 도입도 고려해 달라”고 말했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627호(2020년 1월14~20일)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