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를 이겨내기 위해서 우리는 냉철한 현실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베트남 전쟁 때 근거 없는 희망을 바탕으로 한 낙관주의자들은 되풀이되는 실망으로 스스로 무너져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스톡데일 소장 같은 현실주의자들은 냉혹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는 언젠가는 반드시 석방될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 희망의 힘으로 힘겨운 하루하루를 이겨냈고 마침내 생환됐다.
◆손흥민 ‘73m 질주 골’ 만들어 낸 것은
2016년 재개봉된 영화 ‘쇼탱크 탈출’에서 앤디 듀프레인(팀 로빈스 분)도 냉혹한 현실주의자였다. 억울한 옥살이를 한 그는 억울함이 풀리고 석방되리라는 막연한 기대에 빠지지 않았다. 교도소라는 냉혹한 현실을 받아들이되, 희망을 놓지 않고 숟가락으로 매일 벽을 파내 결국 탈출에 성공했다.
손흥민도 냉혹한 현실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영국의 토트넘에서 프리미엄리거로 뛰고 있는 손흥민은 2019년 12월8일 축구 역사상 두고두고 회자될 명장면을 만들어 냈다. 런던의 토트넘 홋스퍼 스타디움에서 열린 번리와의 경기에서 폭발적인 속도로 73m여 범처럼 달렸다. 물밀 듯이 달려드는 쟁쟁한 수비수 8명을 순식간에 제쳤다. 골키퍼와의 일대일 대결에서 통쾌하게 시즌 10번째 골을 터뜨렸다.
손흥민의 신기(神技)를 본 관중들은 열광했다. 한 때 전 세계 축구팬을 들뜨게 했던 축구 신동(神童) 마라도너의 질주는 손흥민에 의해 빛을 잃었다. 손흥민의 그날 묘기는 ▲할 수 있다는 그의 자신감과 ▲기회가 왔을 때 꽉 잡기 위해 철저하게 준비한 체력관리(제대로 된 지도자는 사람이 따라야 할 길을 따라 살며 하늘의 명을 기다린다; 君子居易而俟命, 군자거이이사명), 그리고 ▲그렇게 치고 질주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상대 선수들의 방심을 꿰뚫은 삼위일체가 만들어 낸 역사였다.
◆‘1·21사태’에서 배워야 하는 것
북한의 특수부대인 124군 소속 31명의 군인은 1968년 1월21일, 청와대 바로 뒤인 창의문(彰義門)까지 침투했다. 그들은 생포된 김신조가 밝힌 것처럼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수다”. 그 때 29명은 사살됐고 1명은 북으로 도망갔다. 우리는 32명이 죽고(군 장병 25명, 민간인 7명) 52명이 부상을 당했다. 지금은 기억하는 사람들도 그다지 많지 않은 1·21사태다.
김신조 일당이 연천군 고랑포 부근의 휴전선을 넘은 것은 1968년 1월18일 밤이었다. 그들은 19일 새벽 꽁꽁 얼어붙은 임진강을 걸어서 건넜다. 고양시 삼봉산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20일 고령산 앵무봉을 통과했다. 북한산 비봉과 승가사로 이어지는 산악길을 타고 21일 밤에 세검정 파출소의 자하문초소에 이르렀다.
경찰과 군이 경계를 강화하고 그들을 찾기 위한 검색검문을 강화했지만 그들은 자하문에 이를 때까지 한 번도 검문을 받지 않았다. 이유는 2가지였다. 하나는 그들의 ‘진격’이 군과 경찰의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시간당 이동거리를 계산해 검문을 펼쳤지만 그들은 이미 그 경계망보다 앞까지 진격해 있었다. 다른 하나는 그들이 한국군 군복을 입고 방첩대 마크를 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방첩대 마크를 달고 방첩대라고 하면 군인이고 경찰이고 무조건 문을 열어줬다.
1·21사태는 우리에게 유쾌하지 못한 4가지 불청객을 가져왔다. 아기가 태어날 때부터 부여되는 주민등록번호가 대표적이다. 주민번호는 공장에서 생산되는 상품의 바코드처럼 아기가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인권침해적 요소가 많다. 지금은 없어진 고등학교와 대학교의 학도호국단과 교련(군사교육)도 그때 생겼다. 향토예비군과 육군3사관학교도 새로 만들어졌다. 2003년 말에 개봉된 영화 ‘실미도’로 알려진 784부대도 창설됐다.
◆코로나19, 전염병 대책의 ABC
‘1·21사태’는 코로나19처럼 갑자기 찾아오는 전염병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를 생생하게 알려준다. 124군은 새롭게 갑자기 나타난 바이러스이고 한국 군과 경찰은 보건 당국이라고 할 수 있다. 124군 침투군처럼 바이러스는 언제 어디에 나타날 것이라고 사전에 예고하지 않는다. 오로지 ‘대통령의 목을 딴다’는 목적을 위해 청와대 코앞에 불쑥 나타난다. 코비도19도 2020년 2월18일 대구에 나타날 것이라고 알리지 않고 갑자기 확산됐다. 보건당국은 이렇게 불쑥 찾아오는 바이러스와 효과적으로 싸우기 위해 체계적인 방역과 치료 시스템을 만들어 놓아야 한다.
둘째로 바이러스의 확산 속도는 사람과 보건당국이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빠르다. 한국 군과 경찰의 방어망을 비웃은 124군 진격속도에 비교할 수 없게 속도전을 펼친다. 교통이 발달되고 여행과 거주이전의 자유가 보장되는 현대에는 전파 속도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다. 밀집활동을 하는 종교 단체에서 집단적으로 발병하고 그들을 매개로 순식간에 확산되기도 한다. 보건당국이 바이러스 발생 초기에 발병지역보다 훨씬 넓은 지역의 감염 가능성을 열어놓고 방역망을 확대하는 게 중요한 이유다. 코로나19 초기 서울에만 집중하다 대구와 경북지역에서 감염이 확산된 사례는 코로나19 이후에도 계속 생겨날 가능성이 크다.
셋째 보건당국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시민들이 방역을 위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코로나19에 감염되면 나는 피해자다. 하지만 감염된 사실을 안 뒤에, 혹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곳에 가서 다른 사람에게 전염시킨다면 뜻하지 않게 가해자가 된다. 당국의 요청과 강제가 있기 전에 스스로 자기 위생을 챙기고 대중 예배나 집회에 참석하지 않는 높은 시민의식을 발휘해야 한다.
넷째 당국은 시나리오별 대응방안을 마련해 두어야 한다. 바이러스는 인간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오로지 자기들의 증식을 위해 인간을 공격할 뿐이다. 당국은 바이러스에 관련된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함으로써 시민들의 과도하게 부풀어진 불안감을 줄여주어야 한다. 현장에서 감염이 늘어나고 있는데 충분히 이겨낼 수 있다든가, 외출할 때는 반드시 마스크를 끼라고 하고도 마스크 공급을 챙기지 않아 ‘마스크 대란’이 일어난다든가 하는 것은 방역을 위해 절실한 신뢰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일이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635호(2020년 3월10~16일)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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